[광주/전남/新명인열전]“시베리아 횡단하며 ‘디지털 실크로드’ 꿈꿔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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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탐험가 김현국씨

1만4000km 시베리아 길을 횡단한 김현국 씨가 세계지도를 가리키고 있다. 그는 “지구 역사는 이동의 역사”라며 “만들어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 탐험이고 용기”라고 말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1만4000km 시베리아 길을 횡단한 김현국 씨가 세계지도를 가리키고 있다. 그는 “지구 역사는 이동의 역사”라며 “만들어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 탐험이고 용기”라고 말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탐험가 김현국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 격식 없는 말투와 호방한 웃음이 이내 경계심을 허물어뜨렸다. 빨리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전남대 산학협력관 2층이다. 25일 오후 ‘당신의 탐험’란 팻말이 걸린 문을 열고 들어섰다. 세계 지도와 여행 사진, 탐험 일정표, 각종 서적과 잡지 등이 66m²(약 20평) 정도 되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탐험가의 방이 이런가 싶었다. 벽면에 큼지막하게 쓴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움직일 때는 망설이지 마라’. 탐험이라는 이름으로 길 위에서 20여 년을 보낸 그의 결기가 느껴졌다.

○ 오토바이로 시베리아 횡단

여행과 탐험은 뭐가 다를까. 여행은 계획할 때까지만 즐겁고 막상 떠나면 고생길이다. 하지만 탐험은 처음부터 쉽지 않은 여정이다. 낯선 길,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면 철저한 준비와 정보가 필요하다. 그래서 탐험 하면 고난, 역경, 위험이란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김현국 씨(48)는 1996년 세계 최초로 시베리아 1만4000km를 모터사이클로 횡단했다. 탐험으로 돈 한 푼 제대로 벌지 못했지만 그의 명함에는 버젓이 ‘탐험가’라고 씌어 있다. 김 씨는 어린 시절 부유했던 집안이 기울면서 좌절 속에 빠진 아버지와 힘겹게 생계를 책임지는 어머니를 보면서 방황했고 집을 떠나 독립된 삶을 꿈꿔 왔다. 전남대 법대에 입학해 고시를 준비하던 1991년 2월, 3개월 관광비자를 받아 무작정 인도로 떠났다. 잠은 길에서 잤고, 먹을 것은 식당 일로 구했다. 그렇게 1년 6개월을 살았다. 인도가 조금씩 보였다.

“유럽에서 온 젊은이들과 함께 여행하면서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들은 경계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어요. 그래서 결심했죠. 나도 경계를 넘어보자고….”

인도에서 돌아온 뒤 그는 지도만 봤다. 그에게 한반도는 너무 좁았다. 대륙으로 눈을 돌렸다. 유독 시베리아가 눈에서 떠나질 않았다. 두려움의 땅, 혹독한 추위와 대자연 속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큰아버지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싶다는 것도 시베리아에 꽂힌 이유였다.

그런데 왜 하필 오토바이였을까. “학교 후문 앞에서 산 즉석복권이 100만 원에 덜컥 당첨됐어요. 흥청망청 쓰는 것보다 오래 남을 물건을 사 보자는 생각에 근처 오토바이 가게로 갔죠, 주인아저씨가 무심코 ‘젊은이라면 오토바이로 세계여행을 한 번 떠나 봐야지’라고 말씀하셨어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안톤 체호프가 마차로 시베리아를 횡단했던 것처럼 나도 ‘현대의 마차’인 오토바이를 타고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보자고 결심했어요.”

1996년 대학 졸업식 직후 러시아로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125cc 국산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다. 습지가 많은 하바롭스크∼치타 구간에서는 타고 가는 것보다 끌고 가는 시간이 더 길 정도로 힘들었다. “시베리아 숲 속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불을 피우고 찌그러진 냄비에 커피를 마시는 게 꿈이었어요. 소박한 꿈에 비해 고통은 너무도 컸죠. 경찰에 쫓기고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고….”

○ 대학생 모아 ‘디지털 실크로드’ 개척 구상

그로부터 18년 후인 지난해 유라시아 오토바이 횡단의 시동을 걸었다. 6월부터 11월까지 ‘아시안 하이웨이 6번’을 통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반환점으로 한국∼유럽 10개 나라를 돌아오는 긴 여정이었다. ‘꿈, 시베리아 그 미래와의 만남’이라는 제목을 걸고, 지구의 동맥을 따라 하루 평균 400여 km씩 2만5000km를 이동했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포트홀(도로 표면의 구멍)의 위험과 끈질긴 모기떼가 그를 괴롭혔다. 시속 100km 이상 달리는 대형 트레일러가 만드는 강력한 바람벽에 밀려날 때면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 했다. “위험한 고비가 많았지만 얻은 것도 있었어요. 유라시아 횡단 육로를 이용하는 물류 운송이 비행기나 배 기차에 비해 얼마나 큰 경쟁력이 있는지 알게 됐으니까요.”

2년 전 탐험은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계기가 됐다. 그는 내후년에 20명 규모의 청년원정대를 꾸려 트레일러를 몰고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계획을 짜고 있다. 단순한 탐험이 아니다. 물류와 문화의 새로운 이동 통로에 대한 발견이며 가능성에 대한 실험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취업이 안 된다고 주눅 들지 말고 시야를 넓혀 보길 바랍니다. 자신의 가능성에 미리부터 한계를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에게는 못다 이룬 꿈이 있다. 10여 년 전 야심 차게 추진했던 ‘새로운 실크로드(N-SilkRoad) 프로젝트’다. 첨단 기술과 정보 능력을 갖춘 각국의 대학생 300여 명을 모아 터키에서 일본까지 도보와 자전거, 말, 낙타 등으로 이동하며 환경, 빈곤, 질병 등 지구촌 문제의 해법을 찾는 ‘길 위의 공동체’를 꿈꿨다. 노키아, 혼다 등 기업의 협찬 약속을 받고 사전 답사까지 했으나 2001년 미국에서 ‘9·11테러’가 터지며 물거품이 됐다. 그는 ‘변화에의 도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지구 대동맥 이동의 대장정을 다시 준비하고 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왔던 암스테르담에서 현대판 실크로드의 종착지인 일본 교토까지 이동하면서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변화를 촉구하고 싶어요.”

그동안 고민의 순간이 없었던 건 아니다. 탐험은 영리를 추구하는 작업이 아니라는 것도 그를 갈등하게 했다. 누군들 안정적인 길에 서고 싶지 않을까. 부인도, 아이들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탐험의 길을 고집해온 그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나 탐험의 꿈이 있다. 하지만 쉽게 떠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잡다한 일상사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 훌훌 털어버리고 떠날 수 있으니까. 그래서일까. 그의 곁에서 바람 냄새가 났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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