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의 시의 눈]아파트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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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인 ―신용목(1974∼)

천 년 뒤에 이곳은 성지가 될 것이다
아파트
이 장엄한 유적에 눕기 위해
고된 노동과
아픈 멸시를 견뎠노라고
어느 후손은 수위실 앞에서 안내판을 읽을 것이다
관광 책자에 찍혀 있을 나의
유골을 구겨 쥐고
관리비 내러 갔던 관리소
종교인들이 층층이 잠들었다는 로마의 카타콤
성스럽게 북벽을 차지하고 걸린 사진처럼
하루는 아침 변기에 앉아
몇 미터 높이와 몇 미터 간격으로
차곡차곡 손을 늘어뜨리고 볼일을 보고 있을
아파트 주민들을 생각했다
박해의 축복처럼 뿌려지는 태양 가루
돌의 사막을 나서는 숫낙타의 갈라진 발톱과
마른 혓바닥을 닮은 여인의 얼굴
모래알을 씹는 아이들이 몸마다 칸칸이
멸망을 분양하고 사는 카타콤에 밤이 온다
구름과 구름 사이에 만찬이 차려지고
간곡함을 거룩함으로 옮겨놓는 시간의 낱장들이
창문마다 아름답게 내걸린다 이대로
한 시대가 끝난다면
나는 순교자가 될 것이다


아파트는 성지가 될 거라고 말하는 표면의 목소리가 있고, 그걸 은근히 비웃는 숨은 목소리가 있다. 시를 따라 읽다가 우리는 문득, 앞의 목소리는 빈말이고 뒤의 목소리가 진심임을 알게 된다. ‘장엄한 유적’이나 ‘순교자’ 같은 엄숙한 말들도 아파트의 편리와 안정 뒤에 드리운 고립과 밀집, 규격화된 삶의 메마름을 드러내려는 위장전술이다.

이 아이러니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시인은 아파트를, 구멍과 미로가 얽힌 지하묘지에 견준다. 둘은 닮았다. 하지만 아주 다르다. 카타콤은 지하의 어둠이지만 기독교인들이 험악한 박해를 피해 숨어들던 은신처이다. 아파트는 공중의 환한 집이지만 사람들이 자진해서 들어가 묻히는 모래의 무덤이다. 여기엔 카타콤을 성지로 만든, 박해라는 이름의 축복이 없다. 그러므로 아파트는 그저 아파트로 남을 것이다.

‘지상의 방 한 칸’을 장만하려고 감내하는 ‘고된 노동’과 ‘아픈 멸시’에 누가 돌을 던지랴. 하지만 공중의 둥지 하나를 짓는 데 평생을 탕진하게 만드는 이 현실, 이 욕망이 문제인 것. 생존의 ‘간곡함’은 전혀 ‘거룩함’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옛 인류를 네안데르탈인이니 크로마뇽인이니 하듯 후손들은 우리를 ‘아파트인’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물려줄 게 닭장 같은 아파트밖에 없는 조상이 된다는 건 좀 창피한 일이다.

이영광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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