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하나회 해체 안했으면 DJ-노무현 대통령 못했을 것”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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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前대통령 서거]추진력 남다른 ‘개혁 대통령’

1987년 민주항쟁



1987년 6월 민추협 공동의장이던 YS가 6·26 대행진에 참석하려다 경찰버스에 실려 가고 있다.
1987년 민주항쟁 1987년 6월 민추협 공동의장이던 YS가 6·26 대행진에 참석하려다 경찰버스에 실려 가고 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재임 중 문민화 개혁은 전광석화 같았다.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한 언론에서 “우회로를 택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쳐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고 회고했을 정도다.

1990년 3당 합당



1990년 2월 ‘3당 합당’을 주도해 민주자유당 현판식을 했다.
1990년 3당 합당 1990년 2월 ‘3당 합당’을 주도해 민주자유당 현판식을 했다.
○ ‘군부에 대한 무혈혁명’ 하나회 숙청

“모두 깜짝 놀랬재(‘놀랐지’의 경상도 사투리).” 1993년 3월 9일 YS는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이렇게 말했다. 전날 하나회 핵심이던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을 전격 경질한 뒤였다. ‘하나회 척결’의 서막이었다.

하나회는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주축으로 한 육사 11, 12기 출신들의 군 사조직이었다. 이들은 주요 군 보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문민 대통령’이라는 기치를 내세운 YS로서는 하나회를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군을 장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후 한 달도 안 돼 수도방위사령관과 특전사령관을 전역시키고 1·3군사령관과 2작전사령관, 군단장과 사단장에 이르기까지 하나회 장성들의 옷을 벗겼다. 하나회 척결은 1995년 하나회 수장 격이던 전·노 두 인사의 ‘반란죄’ 처벌로 이어졌다.

YS는 이후 “내가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군 개혁으로 평화적 정권교체의 기틀이 마련됐다는 얘기다.

1993년 제14대 대통령 취임



1993년 2월 25일 국회 앞 광장에서 열린 제14대 대통령 취임식.
1993년 제14대 대통령 취임 1993년 2월 25일 국회 앞 광장에서 열린 제14대 대통령 취임식.
○ ‘역사를 바꾼 명예혁명’ 공직자 재산공개

YS는 1993년 2월 27일 취임 후 첫 국무회의에서 “정치자금은 주지도 받지도 않겠다”고 선언하며 자신과 가족의 재산을 전격 공개했다. 당시 재산은 17억7822만6070원이었다. YS는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먼저 고통을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것은 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이라며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를 추진했다.

이후 한 달여 동안 여론에 밀린 국회의원, 차관급 이상 고위공무원, 군 장성, 판검사 등이 줄줄이 재산을 공개했다. 김재순 전 국회의장과 박준규 당시 국회의장이 부정축재 의혹에 휩싸여 결국 정계를 은퇴했다. 김 전 의장은 유명한 ‘토사구팽(兎死狗烹·토끼를 잡은 사냥개도 쓸모가 없어져 잡아먹는다는 뜻)’이란 말을 남겼다.

또 YS 자신이 임명한 초대 내각의 일부 장차관, 정치인, 고위 법조인도 부동산 투기 정황이 드러나 사퇴하거나 당을 떠나야 했다. 그해 5월 공직자윤리법이 개정돼 정무직 및 1급 이상 공직자의 재산을 관보에 공개하고 이를 거부하거나 허위 등록하면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 ‘교육시스템 지각변동’ 5·31 교육개혁

YS는 1995년 5·31 교육개혁으로 교육시스템 수술에 나섰다. 개혁의 효과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지만 현재 초중고교 시스템과 대학 구조의 근본 틀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YS는 앞선 1994년 2월 5일 대통령직속 교육개혁위원회를 만들었다. 세계화, 정보화 시대 전환에 대비하고, 당시 교육 병폐를 해소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한 것. 3대 과제로 교육재정 확충, 대학 경쟁력 강화, 사학의 자율성과 책임 제고를 설정했다. 대학 설립과 정원, 학사 운영에 자율성이 확대됐고 대학 평가와 정부 재정지원 연계도 시작됐다. 학점은행제, 전문대학원 도입도 이뤄졌다. 전국에 의대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20년이 흐른 지금 평가는 엇갈린다. 공급자 중심의 교육시스템을 학생과 학부모 중심으로 바꾸고, 학교 간 경쟁을 통해 대학과 초중고교 경쟁력이 향상됐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반면 현재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고교 서열화, 일반고 황폐화, 부실 지방대 난립 등의 근본 원인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2009년 DJ 빈소에서



2009년 8월 민주화운동 동지이자 평생의 경쟁자였던 DJ 장례식장에서 헌화하고 있는 YS.
2009년 DJ 빈소에서 2009년 8월 민주화운동 동지이자 평생의 경쟁자였던 DJ 장례식장에서 헌화하고 있는 YS.
○ ‘날치기 처리 오점’ 노동관계법

YS가 정리해고 도입 등을 핵심으로 한 노동관계법을 1996년 12월 26일 새벽 날치기 처리했다. 이날 오전 5시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 의원 154명은 미리 준비해 둔 버스를 타고 국회 본회의장에 몰래 모였다. 근로기준법 개정안 등 노동 관련 법률과 안기부법 등 11개 법안을 7분 만에 단독으로 처리했다. 당시 경제위기가 가속화하는 상황에서 노동시장 유연화로 대응해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날치기에 대한 반발은 거셌다. “야당이 노동개혁을 가로막았다”던 정부 여당은 “노동법을 재개정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여야는 정리해고 도입을 2년 뒤로 미루기로 합의했다. 후폭풍이 거세 당시 여당은 1997년 대선에서 패했다. 당시 여당 소속이면서도 법안 처리에 반대했던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훗날 “YS 정권 몰락의 신호탄이었다”고 평가했다.

정성택 neone@donga.com·이은택·유성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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