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독재 53년… 양극화로 망가진 미얀마의 삶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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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서광’ 미얀마]김정안 기자 양곤市 르포 3信
민주화 인사 자녀 대학도 못가… ‘우민화 정책’으로 국민 길들여

호화주택 vs 판자촌 반세기 동안의 군부독재를 거치며 미얀마의 빈부 격차는 심화됐다. 양곤 도심 최대 
부촌으로 알려진 골든밸리의 고급 주택가(위쪽 사진)와 어린이들이 폐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셔트곤 지역 빈민가(아래쪽)는 
양극화를 상징하는 장소이다. 양곤=김정안 기자 jkim@donga.com
호화주택 vs 판자촌 반세기 동안의 군부독재를 거치며 미얀마의 빈부 격차는 심화됐다. 양곤 도심 최대 부촌으로 알려진 골든밸리의 고급 주택가(위쪽 사진)와 어린이들이 폐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셔트곤 지역 빈민가(아래쪽)는 양극화를 상징하는 장소이다. 양곤=김정안 기자 jkim@donga.com
김정안 기자
김정안 기자
《 지난해 미얀마에 부임한 안재용 양곤 KOTRA 무역관장은 정착 초기 황당했던 경험을 잊지 못한다. 향후 시장 전망과도 직결되는 미얀마 정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미얀마 헌법부터 알아보려 했지만 전문가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는 것. 안 관장은 “수소문 끝에 만난 박사들은 정작 헌법과 정치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어 놀랐다”며 “결국 인터넷으로 독학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경험담은 반세기 동안 이어진 미얀마의 군부독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62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정권은 국민의 생각까지 지배하기 위해 ‘우민화(愚民化)’에 매달렸다. 지성의 전당인 대학은 그 기능을 상실했고, 그 결과 반독재 투쟁도 동력을 잃었다. 미얀마는 그렇게 독재에 길들어 갔다. 기자가 현장에서 본 ‘미얀마의 민주화’는 영혼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

○ 영혼 잃은 ‘최고 대학’

17일 기자는 미얀마 바한 지역에 위치한 양곤대를 찾았다. 이 대학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100위 안에 들던 명문 대학이었다. 하지만 지난 50여 년간 군홧발에 짓밟히며 처절하게 무너져 있었다.

잿빛의 2층 본관 앞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외국인인 기자는 물론이고 이 대학을 졸업한 현지 안내원도 사전 허가를 받지 않고는 출입이 불가능했다. 금이 간 벽면 곳곳엔 이끼와 곰팡이가 끼어 있었다. 기자의 놀란 반응에 현지 안내원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건물만 낙후된 게 아니다”라고 했다.

이 대학은 1988년 이후 인문사회계열 학부생을 뽑지 않았다. 민주화 항쟁에서 지성을 배제하기 위한 정부의 전략 탓이었다. 이번 총선에서 아웅산 수지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후보로 양곤 시의원에 당선된 니니 씨는 지독했던 탄압을 떠올렸다.

그는 “1988년 8월 8일 학생들이 주도한 민주화 항쟁(‘8888항쟁’) 이후 군부 정권은 전국의 모든 대학을 2년 동안 강제 폐교시켰다”며 “1996년 학생운동이 또다시 촉발됐을 때도 3년간 모든 대학을 폐교시키고 학사 과정도 4년에서 3년으로 축소했다. 결과적으로 대학 수준은 급격하게 떨어졌다”고 말했다. 특히 각 단과대를 여러 곳으로 분산시켜 학생들의 교류를 차단했다는 것. 본인이나 가족이 민주화 투쟁 경력이 있을 경우 학업 기회 자체를 박탈하기도 했다.

새 시대를 열망하는 대학생들이 NLD에 거는 기대는 그래서 더 크다. 양곤 도심에 위치한 다곤대의 에이 슈웨 진 툰 씨(2학년)는 “민주화와 함께 2013년부터 양곤대가 다시 학부생을 뽑기 시작한 것은 고무적”이라며 “민주화의 열기가 대학을 통해 사회 전체로 확대 재생산된다면 파급효과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 핍박받았던 민주 투사

이날 오후 양곤 도심 외각 민가가라 거리에 위치한 NLD지부 사무실을 찾았다. 이곳에서 만난 티 티 민 여사는 이번 총선에서 NLD 후보로 시의원에 당선됐다. 그의 아버지 킨 우소 민은 아웅산 장군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뒤 민주화운동에 헌신해 추앙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 경력은 그의 가족에게 굴레가 됐다. 외출할 때마다 정보원이 따라붙었고, 비밀회동에 참석했던 인사들은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민 여사는 “아버지의 경력이 문제가 돼 내 아들이 의대에 입학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의 몸에는 투사의 DNA가 흐르고 있었다. 민 여사는 탄압 속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키워 갔다. 그는 “아웅산 장군의 유훈인 ‘국가와 나라를 보고 냉철한 이성으로 전진하라’는 말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았다”며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날까지 간절했던 열망을 품고 살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NLD 사무실에서 만난 초 뮤 씨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NLD 로고가 적힌 배지나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것만으로 경찰에 연행되곤 했다”며 “향후 정세에 대한 신중한 기류는 여전하지만 민주화의 온기만큼은 서서히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 국민을 피폐하게 만든 독재

양곤 도심에서 차로 40여 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셔트곤 지역. 대표적 빈민가로 불리는 이곳은 비정규직 청소부 직원과 가족, 그리고 고아들이 모여 사는 집단 판자촌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남루한 차림의 어린이들이 밝은 표정으로 기자를 맞았다.

이곳에서 시의원에 당선된 니니 씨는 “대부분은 고아로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서 폐지 줍기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며 “3.3m2(약 1평) 남짓한 방에서 7, 8명의 한 가족이 사는 집도 허다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근에 위치한 특급 호텔에서는 전혀 다른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방이 녹색 화초와 하얀 장미로 뒤덮인 이곳은 환상 속의 숲을 옮겨 놓은 듯했다. 호텔 관계자는 “상류층 커플의 약혼식이 열리는 날”이라고 말했다. 초대된 하객은 200여 명. 식사 비용만 5000달러(약 600만 원)였다. 호텔 관계자는 “결혼식 식사 비용은 1만8000달러(약 2100만 원) 정도 든다”고 했다. 지난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228달러(약 140만 원)라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사치였다. 안재용 관장은 “양곤 도심 서민촌은 집값이 400달러 안팎(약 50만 원)에 불과하지만 부촌인 골든밸리 지역 집값은 최소 100만 달러(약 12억 원)나 된다”고 설명했다.

미얀마가 이처럼 빈부격차가 심해진 것은 독재 과정에서 벌어진 부패 탓이다. 수익이 큰 각종 사업 허가권을 군부가 독점해 분배하고 뇌물을 받는 구조가 고착화되면서 경제 동력은 상실되고 서민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무엇보다 미얀마의 젊은이들이 꿈을 잃어갔다. 여성들은 봉제나 청소 일자리라도 있지만 남성들에게는 이마저도 없었다. 기자가 양곤에 머무는 동안 도심 길거리에는 삼삼오오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젊은 남성이 넘쳐났다.

안 관장은 “산업 인프라가 갖춰지고 제조업 등에 투자하는 기업들이 들어와야 일자리가 생긴다”며 “고위층과의 연줄이 없지만 사업성만 놓고 투자하는 기업이 줄면서 기회를 잃은 나라가 돼 버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NLD의 총선 승리로 미얀마에도 희망의 싹이 트고 있었다. 1988년 양곤대 시절부터 학생운동을 이끌며 민주화에 투신해 온 민코나잉 88그룹 대표는 “미얀마는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인건비도 싸 정치만 안정되면 외국 기업들의 투자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며 “민주화의 결실이 국민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날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안 기자 jkim@donga.com
#군부독재#미얀마#양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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