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비워낸 옛 공간이 주는 감동, 삼성미술관 리움 ‘한국건축예찬’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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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구석구석의 풍취와 제례 현장의 장엄미를 깔끔하게 요약해 담아낸 박종우 작가의 영상작품 ‘장엄한 고요’. 몇 시간을 묵묵히 거닐어도 지루함을 느낄 수 없었던 종묘 공간의 기억을 되살려준다. 리움 제공
종묘 구석구석의 풍취와 제례 현장의 장엄미를 깔끔하게 요약해 담아낸 박종우 작가의 영상작품 ‘장엄한 고요’. 몇 시간을 묵묵히 거닐어도 지루함을 느낄 수 없었던 종묘 공간의 기억을 되살려준다. 리움 제공
‘응답하라’를 붙여 되새길 만큼 좋았던 시절을 꼽으라면 스물여섯 살이던 2001년이다. 아버지에게 받은 수동 카메라를 메고 나라 곳곳의 오래 묵은 공간을 찾아다녔다. 서울 종묘와 창덕궁, 경기 수원 화성, 경북 영주 부석사, 안동 도산서원, 경주 양동마을과 불국사, 전남 순천 선암사…. 2016년 2월 6일까지 서울 용산구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여는 ‘한국건축예찬―땅의 깨달음’전의 소재와 일치하는 여정이었다.

전시는 올해 말 삼성문화재단에서 발간할 고건축물 사진집 내용 중 일부를 선별해 뼈대로 삼았다. 주명덕 배병우 구본창 김재경 서헌강 김도균 작가가 촬영한 사진을 한 권에 한 공간씩 10권으로 묶었다. 이 사진들 곁에 지역이나 시대와 연관된 옛 서화와 조형물, 건물 일부를 재현하거나 재해석한 구조물, 동영상과 축소 모형을 덧댔다.

김원(건축가), 이상해(문화재위원회 위원장), 김봉렬(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 선정한 열 곳의 장소는 이 땅에서 건축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몇 번쯤 거듭 발을 디뎠을 지점들이다.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 담양 소쇄원을 구석구석 살피며 한동안 넋 놓고 셔터를 난사하다 보면 알 수 있다. 어렵사리 엇비슷하게라도 원형을 지켜낸 옛 건축물은 카메라 든 이에게 달콤한 착각을 안긴다.

‘어, 내가 사진 제법 괜찮게 찍는구나.’

착각이다. 그저 하나같이 ‘나쁘게 촬영하기 어려운’ 피사체일 따름이다. 우리 옛 공간의 가치는 기와지붕과 배흘림기둥의 곡선에만 있는 게 아니다. 어느 돌 위에 앉건, 어느 계단 끝에 서건, 눈과 귀와 코와 피부를 어루만져 붙드는 배려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발길을 기대 머문 이에게 어떤 시선, 어떤 소리, 어떤 바람과 볕을 선사할 것인지 집요하고 세심하게 고민한 흔적이다.

19세기 비단에 그린 경남 양산시 통도사 전경도. 조감도로 표현한 전각의 배치가 실제와 거의 일치한다. 리움 제공
19세기 비단에 그린 경남 양산시 통도사 전경도. 조감도로 표현한 전각의 배치가 실제와 거의 일치한다. 리움 제공
잘 구성됐다면 아직 실제 공간을 경험하지 못한 이에게는 호기심과 기대감을, 옛 여정의 기억을 되돌아보려는 관람객에게는 반가운 설렘을 일깨웠을 전시다. 하지만 후자 쪽 감흥은 썩 만족스러운 편이 아니다. 차림은 푸짐하지만 손 가는 찬은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중국 옛 교역로의 역사와 풍광을 생생히 소개해 화제를 모았던 다큐멘터리 '차마고도-1000일의 기록'을 연출한 박종우 작가의 5분 길이 3채널 영상 ‘장엄한 고요’다.

너비 15.5m, 높이 4m의 3면 스크린을 끌어안고 듣는 빗소리가 사치스럽게 상쾌하다. 이것 하나로 전반적인 아쉬움이 넉넉히 상쇄된다 하기에는 허전함이 크다. 차라리 소재별 사진, 큼직한 동영상, 고미술 작품만 추렸다면 어땠을까. 소쇄원 사진 위 스피커의 새소리 음향은 집중력 잃은 풍성함이 역으로 대책 없는 옹색함을 자아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볼거리는 전시실 밖 모니터에서 돌아가는 30분 길이의 공간스케치 영상이다. 박종우 작가가 촬영한 것을 각 대상에 3분씩 배정해 편집했다. 처마 아래 풍경 소리, 선암사 진입로 물소리와 동백꽃의 흔들림을 정갈하게 담아냈다. 우리 옛 공간의 백미는 잘 비워낸 배려의 솜씨에 있음을 확인시킨다. 만 19세 이하 관람객은 주중에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02-2014-6900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리움#건축예찬#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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