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건설 김석준 회장님의 애도사, 임직원-유족 가슴 적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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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스러운 건설 현장 안 보낼테니… 편히 쉬시길”
‘7전 8기’ 쌍용건설 김석준 회장, 부사장 빈소 찾아

“이렇게 먼저 떠나면 나는 어떡합니까. 앞으로는 고생스러운 현장은 안 내보낼 테니 부디 좋은 곳에서 편히 쉬길 바랍니다.”

16일 밤 서울 동작구 흑석로 중앙대병원 장례식장. 향년 63세를 일기로 15일 췌장암으로 타계한 김동진 쌍용건설 부사장의 빈소에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까만 넥타이를 맨 한 신사가 침통한 표정으로 애도사를 읽어 내려갔다. 30년간 고인과 동고동락한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62·사진)이었다.

회장이 손으로 직접 쓴 애도사를 읽어 나가자 빈소는 숙연해졌다. 몇몇 직원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싱가포르 현지 건설 현장소장을 맡아 지하철, 고속도로 등의 난공사를 진두지휘한 ‘동료’이자 심복을 잃은 김 회장에게 고인의 빈자리는 꽤 큰 듯했다.

“사람을 잃는 게 제일 가슴 아픈 일이에요. 회사를 떠난 사람이야 어디서라도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세상을 떠난 사람은 영영 볼 수 없잖아요.”

애도사를 마친 김 회장이 기자에게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쌍용그룹의 창업주인 고 김성곤 회장의 둘째 아들인 김 회장의 지난 18년은 영욕의 세월이었다. 한때 재계 순위 5위까지 올랐던 쌍용그룹은 1997년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아버지가 세운 회사가 산산조각 나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김 회장은 쌍용건설의 전문경영인으로 남아 구조조정을 이끌며 ‘해외건설 명가’ 재건에 나섰다.

2004년 10월 쌍용건설은 기업재무구조 개선작업(워크아웃)을 마치며 화려한 비상을 꿈꿨지만 위기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채권단은 2007년부터 7번이나 쌍용건설 매각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는 사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고 회사는 워크아웃과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라는 고난의 길에 다시 들어서야 했다. 김 회장도 ‘매각에 부담을 주지 않겠다’며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났다가 직원들과 채권단의 요구로 복귀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쌍용건설은 올해 1월 8번의 시도 끝에 아랍에미리트(UAE) 국부펀드 두바이투자청에 매각됐다. 대주주인 두바이투자청은 김 회장에게 신뢰를 보내며 대표이사 회장 자리를 지키게 했다. 싱가포르의 랜드마크 빌딩인 ‘마리나베이샌즈 호텔’과 도심 지하철,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담수화 플랜트 등 고난도 공사를 성공리에 마무리하면서 동남아시아와 중동에서 쌓은 탄탄한 인맥과 경영 능력을 높이 산 것이다.

7전 8기의 시련 속에서 절치부심(切齒腐心)했던 김 회장에게 30년간 함께 건설 현장을 누빈 고인은 각별했다. 김 회장은 이날 빈소에서 종이컵에 직접 소주를 따라 직원들과 주고받으며 고인과의 추억을 나눴다. “이렇게 한 세대를 치열하게 산 직장인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겠다”는 김 회장의 말에 유족은 꾹 참았던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고인이 병상에서 계속 회사 걱정을 했답니다. 부인이 ‘당신 없어도 쌍용건설 잘 돌아가니까 병 치료에 전념하라’고 당부했대요. 그 말이 그렇게 고맙고 미안할 수가 없어요. 일 잘한다고 평생을 해외에서 떠돌게 했는데…. 지나고 보니 참 몹쓸 짓이었습니다.”

김 회장은 빈소를 떠나기 전 정상화된 회사를 다시 반석에 올려놓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올해 안에 중동에서 좋은 소식이 들릴 것”이라며 “회사의 경쟁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경험 많은) 할머니가 파는 떡도 싸고 맛있어야 사먹는 법이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안주할 수 있겠습니까. 쌍용건설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
#쌍용건설#김석준#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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