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천광암]면세점 유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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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산업부장
천광암 산업부장
정부가 지난 주말 오후 7시 시내면세점사업자 선정 결과를 발표했다. 서울에서는 신세계와 두산이 새롭게 자격을 얻었다. 반면에 롯데와 SK는 각각 현재 운영 중인 월드타워점과 워커힐점의 문을 6개월 안에 닫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로 인해 가장 당혹스러운 이들은 퇴출 예정 면세점 2곳에서 일하는 2200여 명의 종업원일 것이다. 새 사업자들이 고용승계를 약속했지만 전례 등을 볼 때 상당수는 직장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들에게는 퇴출 통보가 정부발 ‘일자리 테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면세점이 사양업종도 아닌 마당에, 더구나 “일자리 창출”을 힘주어 외치고 있는 정부 아래서 왜 이런 일이 벌어져야 할까.

현행 면세점 허가제도는 사업자들이 사업계획서를 써내면 정부가 심사해서 한정된 티켓을 나눠주는 방식이다. 종전에는 기존 사업자의 경우 10년마다 한 번씩 재허가를 받았고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으면 허가가 자동으로 갱신됐지만 2013년부터 절차가 크게 까다로워졌다. 재허가 기간이 5년으로 단축됐을 뿐만 아니라 운영에 별문제가 없어도 서류 써내기 경쟁에서 밀리면 수천억 원을 투자한 사업을 하루아침에 접어야 하는 구조가 된 것이다.

한국은 미국 중국 일본 등에 비해 경제규모가 훨씬 작은데도 불구하고 면세점 시장 규모에서 2010년 이후 줄곧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관광산업에 대한 기여는 절대적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1만202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중복 응답)를 한 결과 쇼핑(72%)이 자연풍경(49%)이나 역사·문화유적(25%)을 제치고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면세점이 ‘관광 한국’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 것은 기존 면세점업체 임직원들의 혁신적 아이디어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눈물 어린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술, 담배나 팔던 곳에 루이뷔통, 에르메스, 샤넬 같은 명품업체들을 입점시켜 면세점이라는 업(業)의 정의(定義)를 바꿔놓은 곳이 바로 한국 업체들이다. 수천억 원대의 마케팅 비용을 써가면서 초기 한류(韓流) 확산에 결정적 공헌을 한 곳도 면세점업체들이다.

물론 성장하는 면세점 시장을 일부 업체가 과점한 구조에는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한화, 신세계, 두산 등 새로운 사업자들을 참여시켜 시장의 경쟁 메커니즘을 활성화시키려는 정책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수천 명이 생계를 기탁하고 있는 기존 점포에 대해 심사위원들이 밀실에 모여 단 이틀 심사하고 퇴출 도장을 찍는 것은 행정권의 횡포에 가깝다.

지금까지 면세점은 혁신적 아이디어로 시장을 개척해온 한국 업체들의 ‘블루오션’이었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다. 중국은 면세점업계의 큰손인 중국인 관광객(유커)들의 쇼핑 수요를 국내로 돌리기 위해 내국인이 출입할 수 있는 면세점을 공세적으로 늘리려 하고 있다. 지난해 8월 하이난(海南) 섬에 세계 최대 규모인 싼야면세점을 개장했고, 베이징(北京) 시내 중심지에 면세점을 짓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일본에서도 노른자위 중의 노른자위 상권인 긴자(銀座) 미쓰코시백화점에 첫 시내면세점이 1, 2개월 내에 문을 연다.

중국과 일본이 중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시내면세점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마당에 ‘5년 시한부 허가’라는 결정적 핸디캡을 안고서는 제대로 된 경쟁을 하기 어렵다. 5년 뒤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한화 신세계 두산 등 신규 사업자들에도 과감한 투자를 망설이게 만들 것이다. 면세점 사업의 승자와 패자를 밀실 속의 정부가 아닌, 공개된 시장이 결정하게 할 수 있도록 면세점 허가제도를 다시 손질해야 한다.

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면세점#신세계#두산#롯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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