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진단]큰 바람이 불면 돼지도 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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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바바, 징둥닷컴 등 중국의 전자상거래 회사들은 탄탄한 물류 시스템과 모바일 기술 등을 활용해 소비혁명을 이끌고 있다. 베이징 시내에서 인터넷으로 주문받은 물건을 실어 나르는 인터넷쇼핑몰 회사들의 삼륜차 택배기사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베이징=박용 기자 parky@donga.com
알리바바, 징둥닷컴 등 중국의 전자상거래 회사들은 탄탄한 물류 시스템과 모바일 기술 등을 활용해 소비혁명을 이끌고 있다. 베이징 시내에서 인터넷으로 주문받은 물건을 실어 나르는 인터넷쇼핑몰 회사들의 삼륜차 택배기사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베이징=박용 기자 parky@donga.com
박용 경제부 차장
박용 경제부 차장
지난주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참석한 ‘제24차 금융중심지추진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이 소식을 듣고 “금융허브 전략이 아직까지 살아 있는지 몰랐다. 그런 위원회가 24번이나 열렸다는 사실에 또 놀랐다”고 말했다.

동북아 금융허브 전략은 2003년에 발표됐다. 하지만 “한국은 동북아의 금융허브”라고 말하는 금융인을 만나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나마 남아 있는 글로벌 금융사마저 떠날까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우간다보다 못한 금융”이라며 외교적 결례에 가까운 평가를 내린 걸 봐도 10여 년간 한국금융의 경쟁력이 크게 높아졌다고 말하긴 어렵다.

금융허브 전략보다 한 해 앞서 추진된 경제자유구역(FEZ)도 올해로 13년이 됐지만 갈 길이 멀다. 당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과 정부가 2001년 10월 ‘서비스업 발전을 위한 금융 및 세제지원 방안’을 내놓았지만 서비스업 선진화는 요원하다. 일이 잘 풀렸다면 “3년째 상임위에 묶여 있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이 처리되면 가계소득이 증가하고 새로운 일자리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며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로 통사정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구호만 있고 성과는 없는 ‘한국병(病)’의 증상들이다.

그러는 사이 경쟁국은 한참 앞서 나갔다. 청년실업률이 10%를 넘어 외환위기 이후 가장 심각하지만 청년들이 선호하는 금융, 물류, 소프트웨어 등 7대 유망서비스업 취업자 비중은 2009년 27%에서 2013년 26%로 오히려 떨어졌다. 반면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신용카드 결제가 어려워 홈쇼핑 사업조차 하기 힘들다는 평가를 듣던 중국은 세계 최대의 전자상거래회사인 알리바바를 배출한 전자상거래 대국으로 성장했다. 알리바바는 이달 11일 ‘중국판 블랙프라이데이(할인행사)’로 불리는 ‘광군제(光棍節)’를 통해 하루 912억1700만 위안(약 16조5000억 원)어치를 팔아치우며 중국의 소비혁명을 이끌고 있다.

한국경제의 해묵은 체증은 제도를 만드는 권한을 틀어쥔 정치권과 정책을 실행하는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이 빚은 합작품이다. 2000년에 공적자금이 투입된 우리은행, 산업은행의 자회사가 된 대우조선해양의 민영화도 장관들과 정치권의 약속만 무성했을 뿐 아직도 진행형이다. 오죽하면 강호인 신임 국토교통부 장관이 “물류 선진화를 얘기한 지 10년이 지나는 동안 미국 아마존은 물류, 유통, 정보기술(IT)을 결합해 세계적 혁신기업으로 거듭났다. 변화와 발전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며 취임사부터 반성문을 썼을까.

우리가 변화에 둔감한 건 법에 할 수 있는 것을 죽 늘어놓고 여기에서 벗어나면 불법의 낙인을 찍는 ‘포지티브 규제’의 덫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과 정부가 움직이지 않으면 되는 일이 거의 없다. 정부가 만든 인허가의 울타리에 들어가면 거친 경쟁 따윈 잊어도 된다. 정부가 규제를 풀어도 관치(官治) 동물원에서 길들여진 금융회사들이 “지침을 내려달라”며 제 발로 돌아온다. 이러니 대기업은 정부가 나눠주는 알짜 면세점이나 인터넷 전문은행 사업을 따내려고 매달린다. 물류시장의 판을 바꾸겠다며 2017년까지 1조5000억 원을 투자하고 청년 등 배송인력 4만 명을 채용하겠다고 발표한 전자상거래 벤처회사 쿠팡은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 규제를 위반했다는 시비에 휘말리는 게 현실이다.

세계경제의 큰 틀은 O2O(Online to Offline·온오프라인 통합) 서비스와 같은 ‘온 디맨드 경제(주문형 경제)’로 바뀌고 있다. 지능형 소프트웨어와 센서, 인터넷과 모바일 통신 네트워크 기술을 활용해 고객이 원하면 언제 어디서나 서비스와 상품을 제공하는 것이 온 디맨드의 정신이다. 정부가 하라는 것만 해선 빛의 속도로 진화하는 주문형 경제를 따라잡기 어렵다.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도 하지 말아야 할 것만 규정하되 사후 처벌을 엄격히 하는 식의 ‘네거티브 규제’로 선회하는 이유다. 우리 경제의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려면 시장에서 강력한 변화와 혁신의 바람이 먼저 불어와야 한다. ‘태풍이 불면 무거운 돼지도 훨훨 난다’는 게 중국 경제에서 검증됐다. 정부와 정치권은 개혁 타령보다 시장이 신바람을 내게 만드는 방안부터 고민해야 한다.

박용 경제부 차장 parky@donga.com
#금융중심지추진위원회#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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