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기억을 잃고 살인자가 된 남자… 진실은 무엇일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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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브라, 기억의 원점/이치은 지음/336쪽·1만3000원·알렙

“구겨진 침대보에서 빠져나와 화장실로 들어가 우중충한 거울 속에서 나는 나를 만났다. 처음 만나는 놈인 것 같은데 조금도 수줍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는 한순간에 기억을 잃어버렸다. 3월 28일의 상황이다. 화자의 앞에는 절반 가까이 뜯겨진 일기장이 있다. 그리고 각기 다른 사람의 신분증 네 장이 있다.

이치은 씨(44)의 새 장편소설 ‘키브라, 기억의 원점’(이하 ‘키브라’)은 기억을 잃은 화자가 3월 28일부터 6월 13일까지 적은 일기가 얼개다. 1998년 ‘오늘의작가상’을 수상한 이래 이 씨는 앞서 ‘다른 사람의 꿈속에 들어가는 사람’(‘노예 틈입자 파괴자’), ‘총격전에 휩쓸리고 상관의 살해 누명을 쓴 대기업 대리’(‘유대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사라졌는가’) 등 순문학에서 보기 어려운 설정을 등장시켰다. ‘키브라’의 주인공은 기억상실증인 상황에서 자신이 연쇄살인범일지도 모른다고 고심하는 사내다. 자신이 살인자인지 아닌지 알아내기 위해 사내는 살인의 증거를 찾아 나선다.

작가는 소설의 인물로 하여금 살인이라는 행위에 대한 ‘소유권’을 획득하는 데 집착하도록 한다. 단서를 추적하고 정보를 구하며 이 과정을 충실하게 기록함으로써 화자는 살인의 소유권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 그러나 화자가 만난 사람들이 “당신은 연쇄살인범이 될 수 없다”며 증언할 때 화자는 그간의 자신의 노력과 기록을 믿을 수 없게 된다.

살인이라는 자극적 소재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쯤 고민하게 되는 문제일 것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정하고 싶은 과거라면 더욱 그렇다. 이치은 씨는 소설의 집필 배경에 대해 “가령 내가 기억상실증에 걸렸을 때, 내가 쓴 형편없는 소설을 읽었을 경우를 생각해 봤다”면서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집필작이) 과연 쓸 만한, 혹은 읽힐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이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밝혔다.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시간이라고 해도 그것이 현재를 이루는 자료가 된다는 얘기다. ‘키브라’의 화자가 그토록 지나온 자신의 흔적을 찾고자 한 이유다. 기억을 잃은 자신의 ‘현재’를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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