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窓]“동생이 그럴리가…” 폐지 주워 모은 2억 털린 할머니의 독백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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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탁한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주름진 눈가를 타고 뺨으로 흘러내렸다. 10여 년 아픈 사람 욕창 닦아주고 배설물 치워주며 번 돈을 다 잃었다. 간병하며 친해진 유일한 단짝 친구도 떠났다. 그래도 원모 할머니(67)는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해 버리면 이제 정말 혼자였다. 믿었던 그놈이 진짜 사기꾼이라고 하더라도.

할머니는 평생 혼자 살았다. 가족을 꾸릴 기회는 없었다. 젊었을 적 우연히 찾은 교회의 일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곳에 가면 적어도 인사 나눌 사람은 있었다. 교회 일만으로는 생활할 수 없어 10여 년 전 간병인이 됐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는 중증환자를 주로 돌봤다.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 몸을 뒤집어가며 욕창과 배설물을 닦아줬다. 고됐다. 몸은 쉽게 피곤해졌다. 환자를 돌보던 할머니는 암 환자가 됐다.

2012년 8월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보험금으로 수술 비용은 해결했다. 오랜 입원 생활은 꿈도 못 꿨다. 남은 보험금을 은행에 저축하고 단칸방을 얻었다. 몸은 쉽게 낫지 않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올랐다. 그래도 움직였다. 혼자인 세상에 기댈 곳은 없었다. 더 늙어서 추해지지 않으려면 용돈을 벌어야 했다.

하루 종일 서울 강서구 일대를 돌며 폐지를 주웠다. 그렇게 모은 폐지는 kg당 70원 받고 고물상에 팔았다. 직접 고물상을 찾는 일은 없었다. 폐지 줍는 할머니들이 폐지를 모아 놓으면 한꺼번에 자동차로 수거해가는 사람이 있었다. 지난해 9월 원 할머니는 서울 양천구의 한 고물상에서 일하는 김모 씨(45)를 이렇게 처음 만났다.

김 씨는 할머니를 “누이”라고 불렀다. “누이, 몸도 안 좋은데 고생했어요”라며 살갑게 굴었다. 사람의 정이 그리웠던 할머니는 마음을 내줬다. 젊은 사람이 참 성실하게 산다고 생각했다. 김 씨 생각은 달랐다. 할머니가 암 치료를 미루며 저축해둔 돈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본색을 드러냈다.

“누이, 제가 원래 베트남에 원단 수출하는 일을 하는데 세금 문제로 은행에 1억6000여만 원이 묶여 있어서 고물상에서 일하고 있는 거예요. 사업 자금을 빌려주면 4배로 갚을게요.”

할머니에게 4배로 늘어날 돈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남동생 같은 김 씨가 안쓰러웠다. 한 번에 200만∼300만 원씩 빌려주던 돈은 1년 동안 2억여 원까지 늘었다. 간병하며 번 돈, 폐지 주워 판 돈, 암 치료 미루며 모아 둔 돈까지 모두 빌려줬다.

돈을 돌려받은 적은 없었다. 박모 씨(68·여·간병인)도 김 씨에게 소개시켜 줬다. 김 씨는 능숙한 말솜씨로 원 할머니도 자신을 믿고 돈을 빌려주지 않았느냐며 박 씨마저 속였다. 발신번호표시제한 서비스를 이용해 시중은행 직원으로 가장한 뒤 사업 투자 독려 전화도 걸었다. 박 씨는 친구를 믿고 28회에 걸쳐 1억8000여만 원을 김 씨에게 건넸다. 박 씨 역시 평생 간병하며 번 돈이었다. 먼저 세상을 떠나면 지적 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이 홀로 살도록 준비한 돈이기도 했다.

서울 강서경찰서는 지난해 9월부터 최근까지 원 할머니 등 4명으로부터 3억9000여만 원을 가로챈 전과 15범 김 씨를 사기 등 혐의로 구속했다고 12일 밝혔다. 김 씨 통장 잔액은 1900여 원뿐이었다.

원 할머니는 피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김 씨가 가로챈 돈을 모두 경륜 등으로 다 썼다고 말해 돈을 찾으려면 소송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도 여전히 김 씨를 믿으려 하는 할머니가 너무 안쓰럽다”고 말했다.

박성진 기자 ps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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