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똥말’ 죽음을 기리며…“굿바이! 차밍걸”

  • 스포츠동아
  • 입력 2015년 11월 13일 05시 45분


‘위대한 똥말’ 차밍걸이 지난 3일 산통으로 세상을 등졌다. 101전 101패의 ‘흑역사’를 안고 경주마에서 은퇴했지만 한 달에 2번이나 출전하는 놀라운 건강과 회복력에 팬들은 박수를 보냈었다. 차밍걸의 삶은 소시민들에게 위안을 주었고 ‘위대한 똥말’이라는 동화로도 출간돼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도 했다. 사진제공|한국마사회
‘위대한 똥말’ 차밍걸이 지난 3일 산통으로 세상을 등졌다. 101전 101패의 ‘흑역사’를 안고 경주마에서 은퇴했지만 한 달에 2번이나 출전하는 놀라운 건강과 회복력에 팬들은 박수를 보냈었다. 차밍걸의 삶은 소시민들에게 위안을 주었고 ‘위대한 똥말’이라는 동화로도 출간돼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도 했다. 사진제공|한국마사회
‘101전 101패’ 불구 성실함·강철체력 대명사
산통 앓다가 안락사…치열한 삶에 마침표


“굿바이! 차밍걸. 네가 있어 행복했다.”

이젠 더 이상 ‘차밍걸’을 볼 수 없다. 만추의 스산함과 축축한 천기가 내려앉은 11월3일. 그녀는 이생의 한 많은 생을 뒤로하고 천상의 마구간으로 영원한 여행을 떠났다. 평범했기에 더 위대했던 생. 모두가 1등을 향해 달릴 때 기꺼이 그들의 ‘디딤돌’이 됐던 삶. 101번이나 출전한 경주에서 ‘어쩌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승할 수도 있으련만 그런 기적마저 그녀를 비켜나갔다. 경주마 은퇴 뒤 목장에서 경기용 승용마로 새로운 출발을 했지만 산통(배앓이)을 앓다가 삶에 마침표를 찍었다. 만 10세였다.

● “산통으로 괴로워해 안락사 시킬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11월 초. 차밍걸은 여느 때처럼 훈련을 하고 있었다. 11월13일부터 경기도 파주에서 열리는 제3회 경기도지사배 승마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3일엔 훈련 도중 장애물을 뛰어넘다 그만 상처를 입었다. 진정제를 주사한 뒤 상처 치료를 했다. 그 과정에서 변비증상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산통이 의심돼 수의사가 달려와 치료했지만 진정되지 않았다. 차밍걸은 많이 아파했고 시간이 갈수록 그 고통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당시 차밍걸과 함께 있던 경기도 화성의 궁평캠프 관계자는 “차밍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 눈물만 났다”며 “수의사의 판단에 따라 안락사 시켰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차밍걸이 그동안 장에 가스가 차는 등 2∼3차례 산통증세가 있었다. 그때마다 조기에 조치를 해 위기를 넘기곤 했었다”고 설명했다.

101전 101패…흑역사로 점철된 ‘똥말’

차밍걸의 삶은 기구했다. 이겨야만 사는 ‘경마의 정글’에서 형편없는 말이었다. 패배자. 루저. 똥말. 그녀를 따라다니는 별명들은 늘 우중충했다. 101번 경주에 출전해 한 번도 시상대 맨 꼭대기에 오른 적이 없었다. 최고 성적은 3위. 한국 경마 역사상 최다 연패를 기록한 ‘흑역사의 장본인’이기도 했다.

차밍걸은 마주가 빚 대신 떠안은 말이었다. 몸무게 410kg. 가녀린 몸매. 차밍걸은 500kg을 훌쩍 넘는 다른 경주마들과는 ‘펀드멘탈’부터 달랐다. 몸집도, 보폭도, 폐활량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야구로 치면 메이저리그의 ‘헤비급 선수’들과 한국 중학생 선수들과의 경기나 다름없었다.

2008년 1월 데뷔이후 소위 3류들이 겨루는 하급레이스인 4군, 5군 경주에 내리 출전했다. 연전연패. 그러나 그녀에게 포기란 없었다. 경주로에 들어서면 늘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쫓아갔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덩치 크고 빠른 경쟁자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비단결 같은 그녀의 마음에 관중들은 날카로운 표창을 날렸다. 그녀가 예시장에 나타나면 “똥말은 꺼져라!”며 비난을 쏟아냈다. 그래도 경주엔 그 어떤 강자보다 많이 출전했다. ‘우등상’은 타지 못했지만 ‘개근상’은 그녀의 몫이었다.

몸으로 때우며 뛰고 또 뛰고

그녀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부진한 성적에도 데뷔 이후 월 2회 꼴로 경주에 꾸준히 출전하며 다른 경주마들의 2∼3배 가까운 경주를 소화하는 ‘성실함’과 ‘강철체력’이 알려지면서부터다. 당시 ‘차밍걸’을 포기하지 않고, 극진히 관리한 변영남 마주는 “차밍걸은 사람으로 치면 잘나지는 않았지만 속이 꽉 차고 성실해 잔꾀를 부리지 않고 제 몫을 다 하는 말이었다”고 말했다.

그렇다. 그녀는 ‘제 몫’을 다했다. ‘돈의 정글’ 속에서도 1등 상금이라는 ‘대박’ 대신 꾸준히 출전해 출주수당을 ‘주인’에게 헌납했다. 경주마의 한 달 관리비는 대략 130만 원선. 상금은 5위까지 주어진다. 12마리가 달려 10위만 해도 출주수당으로 100만원 정도는 받는다.

그녀의 성적은 늘 하위권이었지만 ‘꼴찌’를 한 적은 그리 많지 않다. 한 달에 두 번 뛰고 가끔 중간 성적도 내면서 ‘자기가 돈 벌어 학교 다니는’ 제법 괜찮은 말이었다.

이렇게 줄기차게 뛸 수 있었던 건 차밍걸이 가진 남다른 능력 덕분이었다. 건강과 회복력은 최고 수준이었다. 당시 차밍걸을 조련했던 최영주 조교사는 “보통 경주마는 한 번 뛰면 기력이 빠져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 쉬어야 한다. 하지만 차밍걸은 한 달에 두 번씩 뛴 적도 많다. 잔병치레가 없고 금세 기력을 되찾는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세월은 그녀를 비켜가지 않았다. 세월에 줄기차게 공격당한 기력은 하강선 기울기의 문제일 뿐 다시 상승세로 돌려놓지는 못했다. 결국 2013년 9월28일 101전 101패의 ‘고지’를 밟으면서 경주로를 떠났다.

“굿바이 차밍걸! 넌 위대한 똥말이었어”

차밍걸은 은퇴 후 새로운 도전의 길로 나섰다. 마장마술, 장애물 비월 등 승마를 하는 경기용 말로 ‘제2의 삶’을 시작했다. 경기도 화성 궁평리에 있는 궁평캠프가 그의 놀이터였다. 대부분 은퇴 후 폐사되거나 승용마로 변신하지만 그녀는 승마의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찾아온 ‘산통’에 걸려 최후의 삶을 마쳤다.

차밍걸의 삶은 묵묵히 살아가는 소시민의 그것과 닮았다. 소시민들은 자신처럼 성실하고 묵묵히 자기 할일을 하는 그녀를 보며 위안을 삼았다. 그녀는 서민들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책 ‘위대한 똥말’로 출간되기도 했고 뮤지컬로 제작되기도 했다.

2005년 3월4일 제주 생. 만 10세. 암말. 갈색 더러블렛. 왜소하고 겁 많은 성격. 2008년 경주마 데뷔. 101전 101패. 2013년 은퇴. 2015년 11월3일 사망. 굿바이! 차밍걸.

연제호 기자 so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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