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신영]최초의 ‘벨 에포크’를 생각하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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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황현산 선생이 새로 번역한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을 읽다가 문득 보들레르의 영향이 진하게 남아 있던 19세기 말 유럽의 분위기를 상상했다. 제국주의가 가져온 물질적 풍요와 더불어 문화와 예술이 꽃핀 유럽의 ‘아름다운 시대(벨 에포크)’ 말이다.

이때의 인상이 강렬해서일까. 유럽은 지금도 예술의 본고장으로 회자된다. 인류 최초의 예술이 탄생한 곳이 유럽이라는 생각 역시 꽤 오랫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최근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지되고 있다. 새로운 과학적, 고고학적 연구 성과가 이런 상식에 균열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기원이 유럽이라는 믿음은 여러 ‘물증’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명한 ‘사자인간’은 4만 년 전 지금의 독일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상아 조각이다. 이 작품은 머리는 사자, 몸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상아가 비바람에 이리저리 뒹굴다 우연히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공교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즉 누군가 명백한 표현 의도를 갖고 만든 예술품이다. 고고학자들은 유럽에 정착한 현생인류의 독창적인 창작품이라고 결론 내렸다.

벽화 역시 일찌감치 유럽에서 발견됐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프랑스 라스코(1만9000년 전)나 쇼베(3만6000년 전) 동굴 벽화는 힘 있는 그림체와 구체적이고 섬세한 묘사로 인류가 이미 이 시기에 완벽한 예술가였음을 암시한다. 2012년에는 스페인 남부 엘 카스티요 동굴 벽화의 연대가 이들을 능가할 정도로 오래됐음이(3만7000년 전)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를 통해 새로 밝혀지면서, 이런 생각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제 그림의 기원지는 프랑스와 스페인 등 지중해를 둘러싼 중남부 유럽 언저리로 굳어지는 듯싶었다.

하지만 2014년 가을, 반전이 일어났다. 먼저 그림이었다. 과학 학술지 ‘네이처’에 인도네시아 동쪽 술라웨시 섬에 있던 동굴 벽화의 연대를 다시 측정한 연구 결과가 실렸다. 여기에는 스페인에서 발견된 것과 매우 유사한 손바닥 그림과, 멧돼지로 추정되는 큰 포유동물의 그림이 활달한 그림체로 표현돼 있었다. 놀라운 건 연대였다. 그려진 시기가 최대 4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유럽의 가장 오래된 동굴 벽화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이른 연대였다.

과학자와 고고학자들은 크게 당황했다. 후기구석기 시대에, 동남아시아의 인류는 유럽인에 비해 세련된 석기를 만들지 못했다. 유럽의 고고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동남아시아의 구석기인들이 유럽의 구석기인들보다 석기 제조 능력도, 예술 창작 능력도 부족했다고 못 박아 왔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측정된 자료 앞에선 기존 이론을 대대적으로 수정해야 했다. 이제는 인류 최초의 그림이 유럽과 거의 동시에(혹은 오히려 더 먼저) 아시아에서도 발생했을 가능성을 조심스레 언급하고 있다.

올해는 공예품에 대한 연구 결과가 고고학자와 고인류학자를 흥분시켰다. 러시아 시베리아에 있는 유명한 고고학, 고인류학 유적지인 데니소바 동굴에서 2008년 발견된 녹니석 팔찌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약 4만 년 전으로 나왔다는 외신이 5월 소개됐다. 맞는다면 이 역시 예술이 지중해 근처에서만 기원했다는 통념을 다시 한번 뒤집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예술이 후기구석기 시대에 유럽 지중해 언저리에서 태어나 전 세계로 퍼졌다는 이론은 빛이 바랬다. 인류는 세계 곳곳에서 자신의 표현 욕구를 다양한 미적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인류 여명기의 ‘벨 에포크’는 그렇게 지구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도래했다.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ashilla@donga.com
#벨 에포크#동굴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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