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매거진]잘나가던 가게 문을 닫았다… 요리에 대한 初心 지키려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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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nd]‘10꼬르소꼬모 청담점’에서 만난 이탈리아 스타 셰프 풀비오 피에르안젤리니

《요리사 풀비오 피에르안젤리니(62)의 이력은 특이하다. 로마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뒤 1980년 이탈리아의 휴양지 산 빈첸초에 레스토랑 ‘감베로 로소’를 열었다.

감베로 로소가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두 개 등급을 받고, 전 세계 50대 레스토랑 중 12위로 선정된 2008년 그는 갑자기 식당을 폐점했다.

이미 이탈리아 미식가협회가 선정하는 ‘최고의 요리사’에 5년 연속 1위로 선정돼 요리 거장의 반열에 든 뒤였다.

갑작스러운 퇴장 이후 그를 수식하는 말은 간결해진다. 그가 4월 이탈리아 피렌체의 사보이 호텔에서 요리를 만들자

외신들은 “‘전설적인(legendary)’ 이탈리아 요리사가 피렌체 호텔에서 근무한다”고 보도했다. 해외 호텔에서 요리 자문에 응할 때마다

“이탈리아의 일급 셰프(top chef)가 우리 지역에 온다”는 기사가 어김없이 등장했다.지난달 22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 ‘10꼬르소꼬모 청담점’에서 피에르안젤리니를 만났다.

그는 의류와 책, 음식을 함께 판매하는 이 복합매장에 모인 40여 명의 한국인 앞에서 자신의 레시피를 선보인 뒤 직접 포모도로(토마토)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정상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온 이탈리아인 요리사에게 좋은 요리사, 그리고 좋은 요리의 조건을 들어 봤다.》
지난달 23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 ‘10꼬르소꼬모 청담점’에서 풀비오피에르안젤리니가 직접 포모도로(토마토) 스파게티를 만드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그는 “재능과 기술 외에 문화적 소양까지 쌓아야 요리 본연의 맛을 낼 수 있는 ‘좋은 요리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 제공
지난달 23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 ‘10꼬르소꼬모 청담점’에서 풀비오피에르안젤리니가 직접 포모도로(토마토) 스파게티를 만드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그는 “재능과 기술 외에 문화적 소양까지 쌓아야 요리 본연의 맛을 낼 수 있는 ‘좋은 요리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 제공

―명성이 최고에 달했을 때 레스토랑을 폐점했다. 이유가 뭔가?


“처음 레스토랑을 열 때는 ‘요리를 하면서 바닷가 석양을 볼 수 있는 곳’만 찾았다. 그래서 큰 도로가 없고 접근성이 떨어지는 어촌 마을에 감베로 로소라는 가게를 열었다. 30년이 지나고 명성을 얻으며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미국 유럽은 물론 한국인 고객까지 왔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나의 요리에 대해 왈가왈부하기 시작하면서 요리에 대해 가진 초심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만뒀다.”

피에르안젤리니는 한국에서 지휘자 정명훈(62)의 요리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정명훈은 2003년 내놓은 요리책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Dinner for 8’에서 감베로 로소에서 요리 수업을 받은 내용을 적었다. 정명훈은 당시 이곳을 찾은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57)에게 직접 만든 수프와 감자 퓌레를 대접하기도 했다.

피에르안젤리니는 정명훈과의 인연에 대해 “(정명훈이) 로마의 오페라 감독으로 일할 때 처음 만났다”며 “내 주방에서 며칠간 요리를 해 보고 싶다고 해 초청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사람에게 추천하는 이탈리아 요리가 있을까?

“특정 메뉴를 추천하지는 않는다. 다만 ‘진짜 이탈리아 음식’을 맛보길 권한다. 진짜 이탈리아 요리란 타협이 없는 요리다. 내가 레스토랑 운영을 그만두고 각국 호텔 레스토랑의 컨설팅을 맡게 된 이후 전 세계 손님에게 요리를 내놓는데, 간혹 ‘이건 내가 아는 이탈리아 요리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트볼 스파게티를 이탈리아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탈리아 북부에서 남부까지 어딜 가도 그런 음식은 찾아볼 수 없다. 진짜 이탈리아 음식을 맛보기 위해선 현지에서 그 요리의 유전자(DNA)를 체득한 사람이 만든 요리를 먹어봐야 한다.”

피에르안젤리니는 지난달 23일 40여 명의 한국인에게 자신의 레시피를 선보였다. 또 바질과 토마토가 어우러진 포모도로 스파게티를 만들어 내놓았다.

그는 일상적인 음식일지라도 정성을 담았을 때 훌륭한 요리가 나온다고 강조했다. “재료를 다듬을 때 도구를 사용하는 것보다 손을 사용하는 것이 재료 자체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도구 없이 토마토 껍질을 벗기는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최근 유명 요리사들이 등장하는 TV 프로그램이 많다. 이에 대한 생각은?

“(TV 출연은) 젊은 요리사들에게 득보다 실이 많은 행동이다. 처음부터 TV쇼에 나가고 유명해지게 되면 요리사라는 직업의 본질을 착각할 수 있다. 요리는 열정과 근면, 희생과 존중이 어우러져야 한다. 재료와 음식을 직접 만지고 느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TV쇼의 요리 프로그램은 ‘보여주기’다. 진정한 요리사라면 요리의 맛을 구체화시키는 데 집중하고, 농부들이 길러낸 재료를 손님에게 선보이는 마지막 주자라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나 역시 10년 전쯤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었지만 곧 그만뒀다.”

―기억에 남는 요리, 그리고 손님을 꼽는다면?

“나는 전 세계를 위해 요리하는 요리사다. (웃음)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등 유명인이 나에게 요리를 부탁한 적은 있지만, 누구를 위한 요리든 나에겐 똑같다. 유명인에게 요리를 내놓고 자랑하는 것이 사업 측면에서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요리는 비즈니스가 아니다. 요리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행위다. 그런 면에서 요즘 젊은 요리사들이 안타까울 때가 있다. 레스토랑을 열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드는 만큼 동업자가 필요한데, 그렇게 되면 자유를 잃게 된다.”



―좋은 요리사는 어떤 사람인가?

“많은 사람들이 요리사는 새로운 요리를 만드는 창조자(creator)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전에 좋은 이행자(executer)여야 한다. 클래식한 요리를 완벽하게 만들어, 손님이 접시에 담긴 요리를 받았을 때 겉모습이 아닌 맛만을 오롯이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손님의 영혼을 살찌우는 요리를 선보여야 좋은 요리사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요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타고난 요리 재능과 테크닉을 갖춰야 할 뿐 아니라 해당 요리와 관련한 문화적인 소양까지 쌓아야 한다.”

인터뷰를 마치자 요리사가 아닌 철학자와 장시간 대화를 나눈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요리 하나에도 철학을 가지고, 초심을 지키기 위해 레스토랑까지 닫는 진지한 자세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이 첫 한국 방문인 피에르안젤리니는 짧은 방한 기간 동안 아침마다 숙소 인근 전통시장을 들러 식재료를 연구했다. 고등어와 굴비로 라비올리(이탈리아식 만두)를 만들고, 한국 단감을 이용한 디저트 레시피도 선보였다.

우리 나이로 환갑이 넘은 이 요리사는 “앞으로 국가나 문화권을 초월해 사람들이 ‘가족’을 떠올릴 수 있는 요리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포부를 남겼다. 10꼬르소꼬모를 운영하는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김환중 팀장은 “피에르안젤리니를 시작으로 세계적인 요리사들을 10꼬르소꼬모에 초청하는 행사를 계속 열 예정”이라고 말했다.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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