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민경]심쿵, 1988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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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여성동아 편집장
김민경 여성동아 편집장
가슴 설레는 상대를 만났을 때 ‘심장이 쿵쾅댄다’는 말을 줄여 ‘심쿵’이란 유행어를 쓴다. 해석은 되나 와 닿지는 않는 신조어에 잘도 지어냈네, 하고 콧바람을 불던 내가 최근 말 그대로 ‘심쿵’을 경험했으니, 바로 첫사랑 같은 80년대의 쇼핑백과 재회한 것이다. 복고 유행이 워낙 강력한 데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가 1988년을 호출하자 한 백화점이 그 시절의 ‘엘리베이터 걸’을 다시 데려오는 김에 옛날 쇼핑백 디자인까지 되살린 것이다. 업계의 흔한 마케팅 전략이지만 그 불량한 빨간색을 보자마자 심장은 쿵쾅댔고 단숨에 호랑이가 상모를 돌리던 1988년으로 돌아갔다. 그 시절, 멋쟁이는 차려입은 티가 나야 했다. 청바지와 청재킷을 한 벌 정장처럼 입고, 인공미를 극대화한 화장을 하고, 막 미용실에서 나온 듯 앞머리를 동그랗게 말았다. 그러고 찾아간 곳이 백화점이었다. 사회학자 기 드보르의 표현대로 백화점은 유행과 욕망의 스펙터클을 전시했고 사람들은 처음으로 물건이 아니라 꿈을 쇼핑하는 시대에 도달했다.

패션에서 복고, 즉 레트로(retro)는 70년대 프랑스 언론에 의해 처음 명명됐다. 그 전에도 과거의 형태를 가져오는 역사주의 디자인은 많았지만, 현재에 대한 불만과 불안 때문에 과거를 되살리려는 경향은 분명 새로운 것이었다. 당시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이 40년대풍 패션을 선보여 파리를 발칵 뒤집어 놓았는데 극도로 예민했던 그는 돈과 공장이 지탱하는 산업사회와 모더니즘을 혐오해서 다른 사람들도 곧 자기처럼 과거를 그리워하게 될 것임을 예상했다. 즉, 복고란 좋았던 시절에 대한 회고와 추억이라는 ‘감성’을 파는 것이다. 그래서 복고는 현실이 힘들고 미래가 불안할 때 인기를 얻는다.

창간 82주년을 맞은 여성동아도 1988년의 여성동아를 통해 ‘쌍팔년’을 추억하는 특집 기사를 기획했다. 놀랍게도 그해에도 여성동아 11월호 톱기사는 박근혜 대통령의 ‘육성’ 고백이었고 2015년 아이돌이 입는 옷을 배종옥, 박원숙 같은 당시 인기 배우들이 입고 있다. 야구 점퍼와 무스탕(양피 ‘무통’의 한국식 용어), 물 빠진 ‘청청’ 패션 등등을 소개하는 88올림픽의 해 패션 기사는 마치 올해의 유행을 설명하는 것 같다.

나의 80년대에는 마돈나도 있었다. 여성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도발적인 노래를 부르는 마돈나가 나는 이상하게 좋았지만 내놓고 말하진 못했다. 당시 한국에서 마돈나는 ‘제국주의 문화와 여성 대상화’의 화신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미국에서 큰 진전을 이룬 여성과 성소수자 운동의 상징이 마돈나란 걸 알게 된 건 훨씬 뒤였다. 그 시절 주입된 지식에만 능했던 우리는 지성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라는 것도 몰랐다. ‘(드)센 언니’의 원조로 마돈나를 차용한 에프엑스와 소녀시대의 신곡을 들을 때면 그 시절 마돈나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이제 복고에 대해 가장 궁금한 질문. 30년 전 서랍 속에 처박아 둔 옷을 입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절대불가’다. 80년대 점퍼가 되돌아왔대도 올해 점퍼의 품은 더 커지고 칼라는 날렵하고 소매는 좁아졌다. 그 시절 옷을 입으면 당연히 촌스럽다. 재활용품 분리하는 날에나 입을 일이다. 복고는 좋은 것만 기억하기에 늘 퇴행이라는 부작용에 주의해야 한다. 복고란 추억을 자르고 재단해 현재의 몸에 맞춘 최신상이지 죽은 것을 되살리는 흑마술이 아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복고가 매우 새로운 유행인 이유다.

김민경 여성동아 편집장 holden@donga.com
#심쿵#1998#응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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