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위에 흐른 붓, 사람을 닮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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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추상화의 거장 서세옥展
붉은 인주 색이 눈에 거슬려 낙관 대신 연필로 서명하는 작가
“그림은 그림자의 줄임말이지 화가는 무대 위를 스쳐가는 그림자를 붙드는 사람이야”

전시실 출입구 앞에 걸린 ‘사람’(1998년). 바로 옆에는 ‘산’이라는 제목의 초록색 그림이 있다. 산 그림에 이어 굽이치는 강줄기를 닮은 사람 하나가 뛰어간다. 그 사람이 그림마다 산, 물, 염소, 양, 개, 용으로 돌고 돌며 북적인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시실 출입구 앞에 걸린 ‘사람’(1998년). 바로 옆에는 ‘산’이라는 제목의 초록색 그림이 있다. 산 그림에 이어 굽이치는 강줄기를 닮은 사람 하나가 뛰어간다. 그 사람이 그림마다 산, 물, 염소, 양, 개, 용으로 돌고 돌며 북적인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건장한 성인 남자 팔뚝만큼 굵게 내려 그은 먹물 붓선 위에 연필로 뭔가 휘갈겨 쓴 흔적이 희미하게 보인다. 2016년 3월 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서세옥’전. 발길을 멈추고 잠깐 그 부분만 살펴봤다. 뭘까. 한지 위에 일필휘지로 형성한 그림인데, 사실은 연필 밑그림을 먼저 잡았던 걸까. 아니면 작품이 유리액자 없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동안 몰지각한 누군가의 손에 상처를 입은 걸까. 자세히 들여다보니 ‘서세옥’, 작가의 한글 서명이다. 귀퉁이 낙관(落款) 대신 붓선 속 연필 자국을 남긴 것. 1990년대부터 이 사인 방법을 쓴 서세옥 화백(86)은 “언제부턴가 붉은 인주 색이 눈에 거슬렸다” 고 말했다. 》

“기껏 흑백만으로 그려놨는데 빨간 낙관을 찍으면 흑백이 아닌 게 되잖나. 그래서 연필과 비슷한 아연 펜으로 먹선 위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안 지워지고 눈에 안 띈다. 사인을 남기되 감출 수 있게 된 거다. 화가가 그림 앞에 나서지 않는 것, 그림이 좋아서 한참 들여다보면 ‘아, 이 사람이구나’ 할 수 있는 것. 그런 게 좋다. 요즘 후배들이 좀 따라 하더라.”

전시실에 들어서면 우선 작품 곁에 붙은 제목 메모를 가급적 외면하면서 그림에만 시선을 두고 한번 죽 살펴보길 권한다. 그러고 나서 출입구 곁에서 상영하는 9분 40초 길이 다큐멘터리 영상 ‘도룡(屠龍)’을 보자. ‘무엇을 왜 그리는가’에 대한 작가의 상념을 육성으로 기록한 이 영상이 흥미로웠다면 자연히 다시 전시실로 들어가 한참 머물게 될 것이다.

선사시대 동굴벽화와 두 살배기 꼬마의 낙서가 품은 동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1996년)이라는 제목을 가리고 그림 앞에 서 보자. 무엇이 보이는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선사시대 동굴벽화와 두 살배기 꼬마의 낙서가 품은 동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1996년)이라는 제목을 가리고 그림 앞에 서 보자. 무엇이 보이는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그림을 공부하겠다는 건 ‘용을 잡겠다(屠)’는 말과 같다. 미술? 미(美)의 실체를 눈으로 본 사람은 없다. 앞으로도 없을 거다. ‘이게 아름다움이다’ 하고 단정하는 순간 아름다움은 전혀 엉뚱한 다른 곳에서 튀어나온다. 그게 우리들 화가의 업이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서 화백이 1950년대 이후 그린 대표작 100여 점을 기증한 것을 계기로 마련된 기념전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한국화 911점 중 기증받은 작품 350점의 28%를 그가 채운 셈이다. 서 화백은 “서명을 마친 뒤의 작품은 작가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때부터 작품이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돌아다닐지, 그건 내 뜻대로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림 제목 메모를 읽지 않아도 좋은 것은 1970년대 이후 그린 거의 모든 작품의 제목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람’ 또는 ‘사람들’. 그림은 눈으로 받아들인 사람과 자연, 세상의 모습을 어떻게 이미지로 담아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서 화백의 그림은 사람을 담으려 한 결과물일까. 아니면 종이 위로 흐른 붓이 사람 닮은 무언가를 남긴 걸까. 제목을 외면한 이미지는 때로 동트는 산이고, 일렁이는 파도이고, 웅성대는 숲이다.

“왜 흑백을 고집하느냐고? ‘그림’은 ‘그림자’의 줄임말이다. 화가는 빛나는 무대 위를 스쳐 가는 그림자를 붙드는 사림이다. 그림자를 바라보려면, 떨쳐내려면, 어둠 속에 앉아 있어야 한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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