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주의자의 아이콘’ 日王, 건강 악화설…우경화 가속화 우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9일 16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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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5일 일본 도야마(富山) 현 이미즈(射水) 시에서 열린 ‘제35회 전국 풍요로운 바다 만들기 대회’에서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건강 상태를 의심할 수 있는 일이 벌어졌다.

주최자인 요코야마 사카에(橫山榮) 도야마 현의회 의장이 폐회를 선언하기 직전 일왕이 오른손을 들어 그를 불렀다. 다가간 의장에게 일왕은 “최우수 작문 발표는 끝났나요?”라고 물었다.

불과 30분 전 작문 발표를 직접 지켜보고 박수를 쳤던 일왕이었다. 당황한 의장이 “끝났습니다”라고 말하자 일왕은 그제야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상 위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던 행사 참석자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요코야마 의장은 서둘러 폐회를 선언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궁내청 출입 기자들은 행사 후 설명을 요구했다. 궁내청 담당자는 “혹시나 해서 다시 확인하신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미심쩍은 해명이었지만 기자들은 ‘일왕의 건강문제’라는 부담 때문에 누구도 기사를 쓰지 않았다.

이 소식은 구전(口傳)으로 떠돌다가 8일 도쿄신문과 시사주간지 슈칸분슌(週刊文春) 최신호(11월 12일자)에 실리면서 전말이 알려졌다.

일본에서는 이번 사건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분위기다. 이날 행사는 아키히토 일왕이 왕세자 시절이던 1981년부터 참석한 행사였고, 식순은 전례를 그대로 따랐다. 여기에 최우수상을 받은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은 일왕의 면전에서 큰 목소리로 “방어의 전통은 다른 현에는 없는 도야마 현의 보물”이라고 말해 관람자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함께 웃으며 직접 박수까지 쳤던 일왕이 30분 사이에 발표 사실 자체를 잊어버렸다는 게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는 반응이 나왔다.

궁내청 출입 기자들이 이번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키히토 일왕이 82세로 고령인데다 비슷한 소동이 올해 8월 15일 전국전몰자추도식에서도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추도식 때에는 정오에 시보가 울리면 참석자 전원이 1분 동안 묵념한 뒤 일왕이 추도사를 읽게 돼 있다. 그런데 올해는 시보가 울리자마자 원고를 읽어 버렸다. 지금까지 작은 일탈도 없이 수십 년 동안 엄격하게 전통을 지키던 일왕이었기에 ‘충격적’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아키히토 일왕은 2002년 전립샘 암이 발견돼 수술을 받았으며 2012년에는 협심증 치료를 위한 관상동맥 우회 수술을 받았다. 최근에는 청력도 떨어져 보청기를 착용하고도 다시 묻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슈칸분은 궁내청 관계자가 “최근 예정을 잊어버리는 일이 생기고 있다”며 걱정했다고 전했다.

일본 언론은 아직까지 보도를 자제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도쿄신문은 8일 외부 기고를 통해 “이런 일을 어떻게 보도할지 이번 계기에 솔직히 논의해 보는 것은 어떤가”라고 제언했다. 일왕의 건강 상태는 공공의 이슈이고, 아키히토 일왕 스스로도 그 동안 자신의 병을 감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올해 전몰자 추도식에 참석해 공식행사에서는 처음으로 ‘깊은 반성’이라는 표현을 쓰는 등 과거사에 전향적인 모습으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대비돼 왔다. 일본의 진보세력 사이에서 ‘평화주의자의 아이콘’으로 여겨질 정도다. 그런 만큼 그의 건강악화에는 일본의 우경화가 가속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뒤따르고 있다.

도쿄=장원재특파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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