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스케치]엄마 아빠 장점만 골라 닮았네, 토종돼지의 ‘점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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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돼지 “우린 좀 특별해”

국립축산과학원은 1998년 한국 토종 돼지를 수집해 복원을 시작했고 2008년 복원한 돼지를 ‘축진참돈’이라는 품종으로 등록했다. 흑돼지이며 코가 길고 귀가 앞으로 젖혀진 것이 특징이다. 국립축산과학원 제공
“한국 토종 돼지고기를 한번 맛 본 사람은 다들 다른 돼지고기는 못 먹는다고 하더라고요.”

단풍놀이와 야유회의 계절. 삼삼오오 둘러앉아 먹는 저녁식사 자리에선 단연 불판에 지글지글 구워 먹는 돼지고기가 인기 있다. 어떤 돼지고기를 구워 먹는 것이 가장 맛있을까. 3일 전북 완주군 이서면 국립축산과학원에서 만난 이경태 농업연구사는 ‘한국 토종 돼지’의 맛을 이렇게 전했다.

한국 토종 돼지는 고구려, 신라, 백제가 대립하던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까지 한민족과 동고동락해 온 돼지를 말한다. 원래 만주지역에서 서식하던 여러 종류의 돼지 가운데 특히 이곳저곳으로 잘 움직이는 소형종 돼지가 한반도 땅을 처음 밟았고, 계속 이 땅에 정착해 토종 돼지가 됐다고 알려졌다. 지역에 따라서는 ‘지례돈’ ‘사천돈’ ‘강화돈’ 등으로 불렸다.

한국 토종 돼지와 국산 돼지는 다른 개념이다. 국산 돼지는 국내에서 생산된 외래종 돼지도 포함돼 있다. 흔히 ‘돼지’ 하면 떠오르는 연분홍색 털에 포동포동한 몸을 가진 돼지는 외래종인 ‘랜드레이스’다. 이 품종은 한번에 많은 새끼를 낳아 국내에 널리 도입됐다.

모성애가 극진한 것으로 알려진 ‘요크셔’도 랜드레이스와 색이 비슷하다. 흔히 ‘흑돼지’로 알려진 것 역시 외래종인 ‘버크셔’다. 미국의 ‘두록’ 역시 검은색이다.

“털이 검고 거친 편입니다. 외래종 흑돼지 중 하나인 버크셔는 털에 매끈한 윤기가 돌지요. 돼지의 ‘상징’인 코도 보통 돼지보다 긴 편입니다. 얼굴에는 주름이 쭈글쭈글 잡혀 있고요.”

이 연구사가 한국 토종 돼지의 한 계통인 ‘축진참돈’의 사진을 보여 줬다. 농가에서 보는 가축 돼지라기보다는 날카로운 어금니만 없을 뿐 도심에 곧잘 출몰하는 야생 멧돼지와 가까운 모습이다.

이 연구사는 “1920년 발간된 조선농업편람에 토종 돼지의 모습이 잘 표현돼 있다”며 편람의 구절을 인용했다. ‘피모가 흑색이며 체격은 왜소하고 체중은 22.5∼32.5kg 정도’, ‘머리는 길고 뾰족하며 배는 심히 하수(下垂·아래로 처짐)되어 있고’, ‘비만성이 없으나 체질이 강건하고’ 등의 내용이다.

한국인 입맛에는 토종 돼지가 딱

돼지의 형태를 설명하는 글귀 뒤에는 ‘특히 육미는 조선 사람들의 입맛에 적합한 것 같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 연구사는 “육질을 보면 토종 돼지는 외래종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며 “토종 돼지고기는 자르면 마치 쇠고기 꽃등심 같은 하얀 마블링이 보여 ‘돼지고기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토종 돼지는 외래종에 비해 근육(붉은 고기 부분) 안에 지방이 풍부하게 들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등심 부위를 비교해 보면 토종 돼지의 경우 근육 내 지방 함량이 4∼5%지만 요크셔나 랜드레이스 같은 외래종은 1∼2% 수준이다.

풍부한 근육 내 지방 때문에 토종 돼지는 한국인의 입맛에 제격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돼지고기 중 지방 함량이 높은 삼겹살이 국내 돼지고기 부위 소비량에서 1위를 차지하는 것만 봐도 한국인의 ‘지방 사랑’을 알 수 있다. 또 2013년 농촌진흥청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은 돼지고기를 구워 먹는 것을 가장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고기의 근육 내 지방함량이 높을수록 구웠을 때 육질이 연하며 육즙이 많이 나온다.

최근 유전체 연구를 통해 한국 토종 돼지의 지방이 풍부한 실마리를 발견했다. 이 연구사팀과 김남신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박사팀은 축진참돈과 제주 흑돼지를 포함한 한국 토종 돼지와 두록, 랜드레이스, 요크셔 등 외래종의 유전체를 비교해 토종 돼지의 유전체는 외래종과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결과를 국제학술지 ‘DNA 연구’ 6월호에 발표했다.

국립축산과학원과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은 한국 토종 돼지 10마리와 두록 6마리, 랜드레이스 14마리, 요크셔 15마리의 유전체를 해독해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토종 돼지에서 변이가 일어난 유전자 26개를 발견했다. 이 변이는 해당 유전자가 단백질로 발현될 경우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의 서열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육질과 관련된 유전자인 ‘TTYH3’의 경우 변이가 생겨 560번째 아미노산인 아르기닌(R)이 글루타민(Q)으로 바뀐 것이 한 가지 예다. 김 박사는 “지방세포 분열을 촉진하는 TWIST1 등 지방 관련 유전자가 토종 돼지에 특히 잘 보존돼 있다”며 “이는 한국 토종 돼지가 근육 내 지방 함량이 높아 육즙이 많고 부드러워 육질이 좋은 증거로 볼 수 있다”고 전했다.

맛 좋은 토종 돼지, 식탁에 오르려 ‘업그레이드’ 중


토종 돼지는 맛이 뛰어나지만 현재 식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토종 돼지의 고기가 현재 유통되는 돼지고기 중에 차지하는 비율은 1%도 되지 않는다. 김태헌 동물유전체과장은 “지금 축진참돈을 기르는 농가는 소수밖에 남지 않았다”며 “유통되는 국산 돼지고기 중 토종 돼지 고기는 거의 없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토종 돼지가 농가에서 인기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토종 돼지의 ‘생산성’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토종 돼지는 외래종보다 생장 속도가 느리다. 외래종이 180일 정도에 110kg까지 자라는 반면 토종 돼지는 230일이 되어도 80kg까지만 자란다. 토종 돼지가 한번에 낳는 새끼 수도 외래종에 비해 적다. 외래종은 한번에 12마리 이상 새끼를 낳는 데 비해 토종 돼지는 7, 8마리를 낳는다.

이번 유전체 연구를 통해 외래종이 토종 돼지보다 새끼를 많이 낳게 된 정황도 찾을 수 있었다. 외래종 중 새끼를 많이 낳는 것으로 알려진 요크셔와 랜드레이스 품종에서는 공통적으로 태아 착상에 관여하는 ‘CLDN1’ 유전자가 잘 고정돼 있었던 것이다. 이 연구사는 “외래종의 경우 오직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강력히 선발해 온 결과”라고 설명했다.

축산과학원은 토종 돼지의 맛을 보급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타진하고 있다. 맛 좋은 토종돼지의 육질은 살리면서도 새끼를 잘 낳고 빨리 자라는 외국 품종을 이용한 개량종을 만드는 것이다.

토종 돼지인 축진참돈과 외래종 두록을 이용해 만든 ‘축진두록’을 교배한 ‘우리흑돈’ 품종을 개발해 올해 5월 선보였다. 우리흑돈의 얼굴은 토종 돼지인 축진참돈과 닮았지만 몸집은 두록처럼 크다. 또 축진참돈 특유의 쫄깃하고 고소한 맛은 잘 가지고 있으면서도 두록처럼 빨리 자라는 특성이 있다. 엄마, 아빠의 장점만 골라 닮은 것이다.

이 연구사는 “우리흑돈은 비계 아닌 살 부위를 먹어도 퍽퍽하지 않고 부드러우며 풍미가 좋다”며 “이런 노력은 토종 돼지의 상업화를 위한 업그레이드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난지축산연구소에서는 지난해 3월 다른 토종 돼지인 제주흑돼지와 새끼를 많이 낳는 품종인 한라랜드를 교배해 만든 새 품종 ‘난축맛돈’을 선보였다. 난축맛돈은 근육 내 지방량이 평균 10.5%나 된다. 특히 일반 돼지의 앞다리, 뒷다리 살의 근육 내 지방량이 1∼2%인 반면 난축맛돈은 8%나 된다. 앞다리와 뒷다리 살도 삼겹살같이 부드러운 맛이 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위기 맞은 토종 돼지 1980년대 부활

생산성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토종 돼지가 아예 자취를 감출 뻔한 일도 있었다. 을사늑약을 맺고 3년 정도가 지난 뒤 토종 돼지는 첫 위기를 맞았다. 당시 일제의 주도로 토종 돼지를 개량해야 한다며 외래종인 버크셔와 무분별한 교잡을 시작했다.

1927년 문서인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 성적요람에 일제가 저지른 무분별한 교잡 실태가 잘 나타나 있다. ‘(조선의 토종돈은) 체격은 극히 왜소하여 6∼7관(22.5∼26.3kg)에 지나지 않는다’며 ‘성숙이 늦고 비만성이 결핍하여 경제가치돈 중 최열등하여 이를 개량하는 것이 극히 긴요하다’는 것이다. 일제의 무분별한 교잡으로 토종 돼지는 고유의 형태를 잃고 만다.

광복과 6·25전쟁을 지나 안정기로 넘어오면서는 토종 돼지는 또 다른 위기를 맞게 된다. 토종 돼지보다 새끼를 잘 낳는 요크셔 등 외래종이 본격적으로 도입됐기 때문이다. 외래종 돼지는 뛰어난 생산력을 바탕으로 사육이 확대됐고 토종 돼지를 기르는 농가는 점차 줄어들었다. 그 결과 1960년대 이후에는 순수한 토종 돼지는 한반도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설 곳을 잃은 토종 돼지에게 다행히 부활의 기회가 찾아왔다. 1980년대 말 유전자원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토종종에 관심이 생기며 국내 토종종에 대한 조사와 수집이 시작됐던 것이다. 한국 토종 돼지도 복원 대상으로 선택받았다. 국립축산과학원의 전신인 축산시험장은 ‘토종흑돼지’나 ‘꺼먹돼지’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돼지를 각 지역에서 찾아 모으기 시작했다.

“토종 돼지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웬만큼 규모가 있는 농가에서는 대부분 외래종을 길렀거든요. 강원도 오지나 제주도 민가 등에서 암컷 5마리, 수컷 4마리, 총 9마리를 찾았습니다.”

복원 연구에 참여했던 김 과장이 당시를 회상했다. 이때 토종 돼지를 선발한 기준은 오로지 돼지의 외형이다. 한국 토종 돼지는 흔히 보는 돼지와 확연히 다르다. 크기가 작고 몸무게도 적게 나갈 뿐 아니라 털이 검고 코가 길며 귀가 앞으로 쏠렸다. 또 얼굴에는 주름이 있고 턱은 곧다.

김 과장은 “당시는 유전체학 기술 같은 것이 없어 외형으로만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며 “백색 털, 짧은 코 등 외형이 토종 돼지에서 벗어난 개체를 배제해 가며 선발했다”고 설명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국립축산과학원은 2008년 토종 돼지의 외형 복원에 성공했다. 그리고 복원한 토종 돼지를 축진참돈이라는 품종으로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등록했다. 한국 토종 돼지 혈통으로 품종 등록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또 2008년 136마리뿐이던 축진참돈을 연간 100여 마리씩 지속적으로 등록하고 있다.

현재 이 품종의 돼지를 기르는 곳은 국립축산과학원과 제주 축산진흥원, 충북 축산위생연구소 등으로 일반 농가보다는 국가기관 중심으로 혈통이 유지되고 있다.

신선미 동아사이언스 기자 vamie@donga.com
#토종 돼지#돼지 고기#랜드레이스#버크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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