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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스케치]페달 밟을 때마다 10원, 20원… 세상 밝히는 기부왕 레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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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스케치]페달 밟을 때마다 10원, 20원… 세상 밝히는 기부왕 레이서

김동욱 기자 입력 2015-10-31 03:00수정 2015-10-31 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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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에 사랑 싣고 달리는 이형모 씨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에 도전했고, 세상에서 가장 힘들다는 자전거 대회를 완주한 이형모 씨는 최근 ‘기부’와 ‘도전의식’ 확산을 위해 나서고 있다. 자전거 타기를 통해 4년간 약 4000만 원을 자선단체에 기부한 이 씨가 15일 서울 중랑천 일대에서 자전거를 타다 잠시 숨을 고르며 환하게 웃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해발 8000m. 들숨과 날숨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영하 30도의 추위는 입술도 얼어붙게 만든다. 자칫 발을 잘못 디디면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그래도 오르고 또 올랐다. 산에서 내려와서는 두 바퀴에 몸을 실었다. 40도를 웃도는 날씨 속에서도 페달을 밟았다. 하루 2시간씩 자며 4000km가 넘는 거리를 열흘 넘게 달렸다. 핸들을 잡고 방향을 트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그래도 달리고 또 달렸다. 세계 최고의 산에 올랐고 세계에서 가장 힘들다는 사이클 대회에도 나섰다. 산악인 이형모 씨(36)는 자전거인으로 변신해 쉼 없는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고 박영석 대장과 함께 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코리안 루트 개척에 참가한 이형모 씨. 이형모 씨 제공
제1막: 산악인

그가 나고 자란 강원 원주의 고향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집을 나서면 보이는 것은 논과 산뿐이었다. 그가 산을 자주 찾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산과 친했다. 하루에 버스가 5대밖에 지나가지 않는 시골이어서 친구들과도 주로 산에서 놀았고 산을 타는 것도 익숙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산으로 갔다.

1997년 관동대 사회체육학과에 입학하면서 등산기술을 배우고 싶어 산악부에 들어갔다. 국내의 유명한 산이라는 산은 다 찾아다녔다. 실력이 차츰 늘어가면서 2004년부터는 해외 원정에도 참여했다. 2005년 카자흐스탄의 한텡그리(7010m)와 중국의 쉐바오딩(5588m)에도 오르며 차츰 산악인으로서의 입지도 다져 나갔다.


2006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고(故) 박영석 대장과 인연을 맺고 전문 산악인의 길을 걸었다. 박 대장과 함께 2006년부터 2009년까지 마나슬루(8163m)와 에베레스트(8848m)를 비롯해 임자체(6189m), 가셔브룸(8035m), 중국 희조피크(6004m), 베링 해협 횡단 등 세계 각지의 고산과 오지를 탐험했다. 산에 오른다는 것이 마냥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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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달랐다. 그는 “남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하면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가족과 친구 등 주위 사람들이 많이 힘들어했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필수적으로 위험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산에 오를 때마다 걱정을 하니 나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동료들의 죽음은 등반에 대한 커다란 회의를 가져왔다. 2007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루트 개척 때 오희준(37), 이현조 대원(35)이 눈사태로 숨졌다. 그는 “박 대장과 함께 1년간 같은 아파트에서 살면서 굉장히 친했던 형들이었다. 형들의 죽음 이후 더이상 산행이 즐겁지만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2009년 박 대장과 함께 다시 에베레스트 남서벽 ‘코리안 루트’ 개척에 성공했다. 그는 “형들이 못다 이룬 것을 나라도 대신 이루기 위해 더욱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런데 막상 성공하고 나니 더이상 산에 오를 동기가 사라졌다”고 토로했다.

코리안 루트 개척으로 그는 한 아웃도어 회사로부터 채용 제안을 받았다. 월급을 받으며 안정적으로 산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는 사실 그 전까지 특별한 직업이 없었다. 그는 “당시 박 대장 집에서 함께 생활해서 그다지 돈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돈이 필요할 때면 등반 가이드나 기업체에서 등반 교육을 했다. 남서벽 루트 개척으로 포상금 300만 원을 받은 것이 그동안 만져본 가장 큰돈이었다”며 웃었다.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그는 더이상 산에 오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산에 오를 목표도 의지도 없던 상태였다. 박 대장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박 대장은 “이제 산에 편하게 다닐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는데 왜 그만두느냐”며 펄쩍 뛰면서 만류했다.

그는 산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핑계를 찾았다. 우연히 TV로 봤던 철인 3종 경기가 떠올랐다. 박 대장에게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박 대장의 완강한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그는 산을 더이상 오르지 않게 됐다. 회사에서 월급을 받으면 그동안 못 했던 효도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이 불편해서 결국 입사 서류까지 작성하고 접수시키지 않았다.

2009년 6월부터 ‘산악인 이형모’는 없어졌지만 박 대장과는 2011년까지 함께 생활했다. 박 대장은 그가 철인 3종 경기에 나선 뒤로도 여러 가지 배려를 해줬다. 2011년 박 대장이 안나푸르나(8091m) 등정을 할 때 준비 과정을 함께했다. 그것이 박 대장과의 마지막이었다. 박 대장은 그해 안나푸르나 남벽 등정 도중 실종됐다.

“박 대장의 소식을 듣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함께 등정했다면 박 대장이 그런 일을 당했을까? 내가 박 대장 대신 죽었을 수도 있었을까? 같이 있어 주지 못했던 것이 미안했다.”

이형모 씨가 지난해 미국 횡단 자전거 레이스(RAAM) 1인 부문에서 11일 21시간 58분으로 완주한 뒤 자전거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 이형모 씨 제공
제2막: 자전거

산을 떠나 2010년까지 철인 3종 경기에 나섰다. 하지만 1년 만에 그만뒀다. 당시 목표가 국가대표급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었는데 철인 3종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수영에서 생각한 것만큼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 몸도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자전거는 놓지 않았다. 2011년 자전거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게 된 계기가 왔다.

“2010년 한 자전거 대회에서 만났던 자전거 애호가 김기중 씨(42)가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자전거 대회에 나간다며 파트너가 돼 달라고 제안했다. 세계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자전거 대회라는 소리를 듣고 막연하게 세계 최고봉을 올랐던 사람인데 그까짓 것 못 하겠나 싶어 덜컥 수락했다.”

그가 참가한 대회는 미국 대륙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하는 자전거 레이스(RAAM·Race Across America)다. 1980년에 창설된 유서 깊은 대회로 총거리는 매년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4800km 정도다. 지난해 1인 부문에 516명의 라이더가 참가해 절반이 안 되는 230명만이 완주했을 정도로 힘들기로 유명하다.

RAAM 참가를 위해 훈련에 매진했던 그는 참가를 포기해야 할 위기를 맞았다. 대회를 두 달 앞두고 교통사고를 당해 종아리뼈가 부러졌다. 병원에 50일간 입원했다. 김기중 씨가 병원에 찾아왔을 때 대회에 출전할 수 있다고 고집을 피웠다. 결국 퇴원해 열흘 훈련하고 대회에 참가했다.

정상적인 몸도 아닌 상태에서 처음 경험한 RAAM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2명이 교대로 2∼4시간씩 달렸다. 뒤따르는 지원 차량에서 교대로 잠시 눈을 붙이고 식사를 해결했다. 너무 졸리고 피곤해서 눈꺼풀이 감길 때가 많았다. 다른 참가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자전거에서 졸다가 넘어져 크게 다치는 경우가 많았다. 미처 다 붙지 않은 뼈는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표면이 고르지 못한 도로나 과속방지턱을 지날 때면 그 진동 때문에 뼈가 사무치게 아팠다. 너무 아파 진통제를 맞고 먹어야 했다.

8일 1시간 15분 만에 완주에 성공했다. 완주 마지노선인 12일보다 무려 약 4일이 빨랐다. 첫 참가였지만 50세 미만 그룹에서 가장 먼저 들어오며 우승이라는 뜻밖의 선물도 받았다. 2인 부문 우승으로 자신감을 얻은 그는 2014년에는 1인 부문에 도전했다.

“대회 참가 직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참가 몇 달 전 아버지의 암이 재발했는데 한동안 훈련도 하지 못해 대회 참가도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경기 열흘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가족들이 ‘아버지가 대회에 참가하라고 일찍 하늘나라로 갔다’고 위로해줬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달렸다.”

굳은 결심에도 불구하고 1인 부문은 2인 부문과는 그 어려움이 달랐다. 교대로 달리며 잠을 청할 수 없어 길바닥에서 잠깐씩 잠을 청했다. 길게 자봐야 20분이었다. 하루 22시간을 달리는 강행군 탓에 포도당 주사를 맞으며 달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계에 다다른 몸은 서서히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졸린 탓에 고개가 자꾸 앞으로 숙여지자 그는 허리와 헬멧을 잇는 줄을 묶어 강제로 목을 뒤로 당기게 만들기도 했다. 그는 “잠깐 잠을 청할 때면 오늘과 똑같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무서웠다”고 말했다. 그는 탈락 기준을 약 2시간 앞둔 11일 21시간 58분에 골인 지점을 지났다. 50세 미만 그룹에서는 마지막 완주자였다.

두 번의 RAAM 참가는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국내에서 열리는 각종 자전거 대회에 참가했다. 나갔다 하면 1등을 휩쓸었다. 어느새 자전거를 좀 탄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자전거가 고장 나지 않는 이상 입상은 기본”이었다. 약 4년간 100여 개의 대회에 출전해 80회 정도 우승을 차지했다. 이제 더이상 사람들은 산악인 이형모가 아닌 자전거인 이형모로 그를 불렀다.

제3막: 기부인


2011년 첫 RAAM 참가 때 그는 의미 있는 일을 준비했다. 바로 기부였다. RAAM은 상금은 없고 각 부문 우승자에게 트로피만 주어진다. 많은 사람이 우승보다는 도전한다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둔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기금 모금 또는 에이즈 환자에 대한 지원 등 사회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참가하는 사람이 많다. 자신들이 달린 거리에 따라 후원금을 받아 기부를 하는 참가자도 있다.

그도 무작정 완주나 기록을 위해 달리기보다 기부를 하며 참가의 의미를 더욱 뜻깊게 만들고 싶었다. 대회 참가 전 그는 김기중 씨와 함께 기부하고 싶은 곳을 한 군데씩 정해 기부를 약속했다. 그는 “나는 큰돈도 없고 직장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려운 친구들을 돕고 싶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자전거로 달리는 것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몇몇 기업체의 후원을 받고 대회 참가와 기부 활동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소개하면서 그와 뜻을 함께한 사람들에게 기부금을 받았다. 대회를 마치고 그와 김기중 씨는 두 곳의 자선단체에 600만 원을 기부했다.

그의 기부활동은 일회성 이벤트로 그치지 않았다. 자전거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1000원씩 돼지저금통에 넣었다. 같이 자전거를 타는 동호인들에게도 돼지저금통을 나눠주며 기부를 권유했다. 직접 자전거대회를 열어 기부금도 모았다. 2011년 자전거 수입·판매 업체에 입사한 그는 2년 전부터 자전거 교육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교육비를 받지 않는 대신 자선단체 후원계좌를 알려줘 자발적인 기부를 독려했다. 그는 “기부와 함께 내가 자전거를 타고 산에 오르며 만났던 난관을 극복하게 해주었던 자신감과 용기, 그리고 그것을 넘어섰을 때의 즐거움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도전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도전의식 전해주기’를 준비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남들과 다르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요. 뭔가에 도전한다는 것도 박수보다는 손가락질을 받을 때가 많아요. 그런 사람들에게 다양한 도전을 할 수 있게끔 용기를 주고 길을 열어주고 싶어요. 전 운이 좋아 그런 경험을 많이 했어요.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어린 친구들이 원하는 것에 도전할 수 있게끔 응원하고 박수쳐주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이형모#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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