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그때 이런 일이] ‘포크록 선구자’ 한대수 컴백

  • 스포츠동아
  • 입력 2015년 10월 29일 07시 05분


■ 1997년 10월 29일

1968년의 어느 날 밤, 그 유명한 서울 무교동 세시봉 무대에 낯선 청년이 섰다. 방송사 PD였던 MC 이백천이 “뉴욕에서 특별한 손님이 오셨다”(1998년 7월17일자 경향신문)고 소개한 청년은 “장막을 걷어라/나의 좁은 눈으로/이 세상을 더보자/…”(행복의 나라로)라며 노래했다. 절제되지 않은 거친 목소리의 노래는 이내 또래 청춘들을 사로잡았다. 한대수(사진)였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물결을 목격한 그는 히피문화를 전도하듯 노래했다. 청춘은 그를 반겼고, 기성의 어른들은 비난을 퍼부으며 추방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1976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21년 뒤 바로 오늘, 한대수가 고국의 무대 위에 다시 나섰다. 이날 오후 7시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유니텔 록 콘서트’였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고국을 떠나 49살의 나이에 돌아왔다. 이날 한대수는 산울림, 사랑과평화, 전인권, 강산에, 크래시, 부활, 황신혜밴드 등 장르와 뚜렷한 개성을 달리 하는 록밴드와 가수들 사이에서 ‘행복의 나라로’ 등을 노래했다. 미국의 모던포크와 한국적 정서가 어우러진 음악으로 ‘한국 포크록의 선두주자’로 인식된 ‘전설의 가수’를 또 다시 젊은 관객이 환호로 맞았다.

한대수는 1948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자신의 어린 시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핵물리학자 아버지의 실종은 그가 평생 간직해온 예술혼의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사라진 뒤 할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초등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10대 시절을 다시 한국에서 보냈다. 고교 시절 미국에서 아버지와 극적으로 상봉했지만 우울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는 한 상담교사를 만나 시와 예술에 눈을 떴다. 가요사의 명곡으로 남은 ‘행복의 나라’ 등이 당시 썼던 노래다.

1968년 귀국한 그는 세시봉을 통해 한국의 청춘들을 만났다. ‘멀고 먼 길’ ‘고무신’ 등 앨범을 통해 ‘물 좀 주소’ 등 사랑과 자유를 노래했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청년문화를 불온시 여긴 정치권력은 그와 그의 노래를 ‘금지’시켰다. ‘고무신’은 발표되기도 전에 마스터테이프가 압수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다시 1976년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뉴욕을 본거지 삼아 사진작가와 시인으로도 활동하며 간간이 국내에서도 앨범을 발표한 한대수는 이제 가수로, 예술가로서 아무런 장벽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자신이 남긴 또 다른 문화사의 우여곡절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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