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하 전문기자의 그림엽서]난민은 존엄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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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된 세 살베기 시리아 난민 소년 알란 쿠르디의 죽음을 추모하고 난민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인도 아티스트 수다르산 팻낵이 만든 모래조각. 팔레스타인인 거주 가자지구 해변이다.
터키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된 세 살베기 시리아 난민 소년 알란 쿠르디의 죽음을 추모하고 난민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인도 아티스트 수다르산 팻낵이 만든 모래조각. 팔레스타인인 거주 가자지구 해변이다.

유럽대륙의 호수 같은 바다, 지중해. 워낙 넓다 보니 해역별로 고유 명칭이 있다. 동편의 그리스와 터키 사이는 에게 해다. 그 바다엔 아름다운 섬도 많아 ‘지중해의 진주’라 불린다. 청동기시대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크레타, 미노스 등의 섬과 좋은 기후, 멋진 풍광 덕분이다. 그래서 크루즈 여행의 보고가 됐다. 모항은 그리스의 아테네. 유람선은 그리스의 섬을 경유해 아시아 지역인 터키의 유적도시 에페수스까지 오간다. 버킷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그리스 산토리니도 에게 해 키클라데스 제도의 섬이다.

누구든 가고 싶어 하는 에게 해가 요즘은 비극의 무대로 변했다. 엑소더스 중인 시리아 난민들이 생사의 기로에 선 곳으로 말이다. 지금 이 순간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맨몸의 난민들이 가랑잎처럼 흔들리는 보트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테니. 알란 쿠르디의 가족도 그랬다. 쿠르디는 지난달 2일 터키의 한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된 세 살배기 시리아 소년이다. 아빠는 아내와 두 살 터울의 형제를 데리고 에게 해를 건너 그리스로 가다가 보트가 전복돼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잃었다.

내가 쿠르디의 사진을 본 건 취재차 이스라엘에 머물 때였다. 그건 내게도 충격이었다. 그 직후 보도를 접하니 유럽은 난민 수용 여부를 놓고 흔들리고 있었다. 미온적이던 난민수용정책에 대한 반성과 변화, 그로 인한 혼란 때문이다. 심정적으로는 수용해야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아랍계 난민 수용으로 떠안게 될 경제·사회적 비용과 문화·종교적 갈등에 대한 우려도 만만찮으니.

그렇지만 쿠르디 사건으로 세상은 정신을 차렸다. 난민구제가 선택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쿠르디 사고 전 지중해에서 숨진 난민이 올해만 2643명이라는 국제이주기구(IOM)의 통계도 큰 힘을 보탰다. 다른 유럽국가와 달리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처음부터 진솔했다. 흔들림 없이 초지일관했다. 그는 8월 26일 모든 난민을 수용하겠다고 선언하고 올해 80만 명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80만 명’은 지난해 유럽연합 28개국이 들인 난민 수를 넘는 수치다.

메르켈 총리의 이 선언은 독일 국내의 난민 거부 움직임 속에 나온 것이어서 더욱 돋보였다. 당시 드레스덴 근처 하이데나우 시에선 극우주의자들이 난민 250명이 탄 버스를 가로막고 경찰에게 폭력까지 휘둘렀다. 총리는 그 현장을 찾았고 자신에게 ‘배신자’라고 야유하는 시위대를 향해 일갈했다. ‘난민도 존엄의 대상이며 독일은 그래야만 한다’고.

지금 내전으로 고통받는 시리아인은 2200만 명. 이 중 25만 명은 숨졌고 760만 명은 집을 잃은 채 나라 안을 떠돌고 있다. 400만 명은 터키 이라크 레바논 요르단 이집트에 이미 이주했고, 또 다른 400만 명은 국경을 넘어 정착할 곳을 찾거나 찾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은 난민을 낳는다. 그건 독일도 다르지 않았다. 나치독일에서도 모든 국민이 히틀러를 추종한 건 아니다. 수많은 독일인이 배편으로 독일을 등졌다. 그중엔 일제강점기의 우리나라를 찾은 이도 있다. 김일성 별장이라 불리는 ‘화진포의 성’(예배당)을 지은 건축가 H. 베버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서독도 그랬다. 구소련 위성국가로 전락한 동독 내에서 섬처럼 고립됐던 베를린의 서쪽 시민들도 한때는 난민이었다. 당시 베를린 시는 연합군(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점령돼 소련군 관할의 동베를린, 서방연합군 관할의 서베를린으로 양분됐다. 그런 베를린을 소련이 1년간(1948년 6월∼1949년 5월) 무력으로 봉쇄했다. 육로와 수로 통행을 막은 것이었다. 이때 서방이 베를린을 포기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통일된 지금의 독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합군은 베를린을 버리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무력 충돌도 피하지 않고 비행기로 생필품을 공수했다. 항공기 추락 등 피해도 적지 않았지만 서베를린 시민을 외면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독 출신인 메르켈 총리는 그 당시를 기억했을 것이다. 사람에 대한 존엄을 목숨 걸고 보호한 당시 서방의 의연함을. 유럽연합에 지금 필요한 건 이런 역지사지(易地思之)다.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
#난민#전쟁#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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