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활의 시장과 자유]동북아 외톨이 ‘한자 문맹’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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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활 논설위원
권순활 논설위원
현재 중국에 약 6만 명, 일본에 1만5000명의 한국 젊은이들이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 낯설고 물선 땅에서 힘들게 공부하지만 기초 한자(漢字) 실력이 모자라 적응에 애를 먹는 유학생이 적지 않다. 정상적으로 학년이 올라가지 못하고 유급하는 학생도 있다. 미리 한자를 익혔다면 겪지 않았을 시간과 돈의 낭비, 정신적 고통이 만만찮다.

이근면 인사혁신처장은 얼마 전 신입 공무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충격적 경험을 했다. 이 처장이 “여러분은 국가의 기간을 이루는 인재”라고 말하자 참석한 모든 새내기 공무원들이 ‘중심이 되는 부분’이라는 뜻의 기간(基幹)을 기간(期間)으로 잘못 알아들었다. 한자어에서 유래된 단어가 많은 행정용어를 다루는 공무원들의 ‘한자 문맹(文盲)’은 행정효율을 현저히 떨어뜨릴 위험성이 높다. 중국 일본과의 경제 교류가 많은 산업계에서도 젊은 직원들의 한자 이해 능력이 낮아 골머리를 앓은 지가 꽤 오래됐다.

고전하는 한국 젊은이들

한국어 어휘 중 순수 우리 낱말을 제외한 한자어의 비중이 53%라는 주장도 있지만 대체로 70% 정도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과학 용어는 85%가 한자어다. 한자어에서 나온 어휘 중에는 발음은 같아도 뜻이 다른 단어가 적지 않다. 가령 ‘전력’이라는 단어는 戰力 電力 前歷 全力. ‘최고’라는 단어는 最高 最古 催告 등의 뜻이 모두 다르다. 한글로만 쓰면 명확한 의미 파악이 어렵다.

일본은 초중고교 교육과정에서 2136자의 상용한자를 가르친다. 일본도 표음(表音)문자인 히라가나와 가타카나가 있지만 한자교육은 일본어 교육의 필수 과정이어서 고교만 졸업하면 웬만한 한자는 능숙하게 구사한다. 한국도 중고교에서 1800자의 한자를 가르치고, 2018년부터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한자교육을 시행할 계획이니 언뜻 보면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버젓한 대학을 나와 대기업이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젊은이들도 ‘한자 문맹’이 즐비한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하나.

한자 문맹은 어휘력의 빈곤화와 고급 지식의 전달 장애 외에 실용적인 면에서도 어두운 그늘을 드리운다.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과 일본은 세계 2위와 3위의 경제대국이다. 인구도 중국 일본 대만 세 나라만 합쳐도 15억여 명으로 세계 전체 인구의 21%를 넘는다. 앞으로도 영어가 가장 핵심적인 국제어 자리를 차지하겠지만 중국어와 일본어의 바탕인 한자 역시 중요성이 더 커질 것이다. 한국 중국 일본의 한자가 다소 차이는 있지만 한국의 한자를 알면 중국과 일본에서 사용하는 한자를 배우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국수주의 언어관 벗어나야

한글의 독창성과 우수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한글을 사랑한다고 해서 한국어의 일부가 된 한자어를 배척하는 것은 지나치게 국수주의적인 문자관이다. 조선 성종 때 대제학 서거정이 신라시대 이후 우리 선조들이 쓴 빼어난 시문(詩文)을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은 한문이긴 하지만 전통문화와 자주적 성격이 뚜렷하다는 평을 듣는다. 서거정이 동문선 서문에서 ‘동방의 글은 송과 원의 글이 아니고 한과 당의 글도 아니며 바로 우리나라의 글’이라고 강조한 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한국인이 모든 한자를 알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일상생활에 자주 사용되거나 한자 문화권과의 외교적, 경제적 교섭에 필요한 한자는 몸에 익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자 문맹이 늘어날수록 한국이 동북아시아와 지구촌에서 외톨이로 전락할 위험성은 그만큼 더 커진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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