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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내게 남은 일은 엄마 유해-작품 지키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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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내게 남은 일은 엄마 유해-작품 지키는 것뿐”

부형권 특파원 입력 2015-10-28 03:00수정 2015-10-28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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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화백 별세 그뒤]


▼갈라선 자녀들… 하늘서도 편히 못쉬는 ‘슬픈 전설’▼


의문부호가 붙은 채 2개월이 지나서야 큰딸에 의해 알려진 천경자 화백(사진)의 사망. 이를 둘러싼 논란이 결국 자식들 간의 공개 설전으로 번졌다. 천 화백의 유골을 품고 비밀리에 한국을 다녀간 큰딸 이혜선 씨(70·섬유 디자이너)는 26일(현지 시간) 본보 특파원과 미국 뉴욕에서 단독으로 만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전하며 동생들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토로했다. 27일 서울에서는 장남 이남훈 씨, 차녀 김정희 씨 등 다른 유족들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들은 “이혜선 씨는 유족 대표가 아니다. 어머니의 유해를 어디에 모셨는지 알려주지 않는다면 법적 대응책을 찾겠다”고 맞섰다.

▼“내게 남은 일은 엄마 유해-작품 지키는 것뿐”▼


장녀 이혜선씨 뉴욕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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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한 국내 행사에 참석한 고 천경자 화백(왼쪽)과 큰딸 이혜선 씨. 동아일보DB

“엄마의 장례미사를 지낸 이 성당을 찾는 게 저의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26일(현지 시간) 오후 2시 15분 경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한 성당에서 고 천경자 화백(향년 91세)의 큰딸 이혜선 씨(70·섬유 디자이너)를 만났다. 그녀가 한국에 갔을 때 음성메시지에 남긴 연락처를 듣고 전화를 먼저 걸어와 성당 앞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다.

성당은 주택가 건물들 사이에 있어서 눈여겨보지 않으면 자칫 지나칠 수 있는 작은 규모였다.

이 씨는 고인을 위한 기도를 이미 마친 듯 성당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는 기자를 인근 찻집으로 안내한 뒤 블랙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5시간 넘게 울분을 토하듯 엄마(천 화백) 이야기를 쏟아냈다.

기자에게 “엄마와 관련해서 가장 궁금한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먼저 던지기도 했다. 기자는 고인의 죽음에 대해 의문스러운 것들을 하나하나 물었다.

-고인의 생존 여부를 확인해 달라는 정부와 언론 요청을 계속 거절한 이유가 있나요.

“처절한 모습으로 병석에 누워있는 상태에서 엄마가 누굴 만나겠습니까. 더구나 엄마는 자의식이 강한 예술가입니다. 엄마는 건강했을 때에도 ‘병원에 가면 환자가 아니라 가족을 문안하는 게 예의다. 아픈 환자를 보려는 건 예의가 아니다. 내가 아플 때는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병간호 하는 자식이 버젓이 있는데 아픈 어머니 얼굴 좀 보자, 사진 좀 찍자고 달려드는 몰상식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남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명백한 사생활 침해였지요. 이 때문에 상처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 씨는 이어 “예를 들어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위독하셨을 때 박지원 의원이 창구 역할을 했다는데 그 때 누가 ‘DJ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 사진 좀 찍자’고 하는 사람이 있었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뉴욕에서 고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왜 없습니까. 성당 신부님도 봤고, 의사 선생님도 봤고, 간호사도 봤고, 물리치료사도 봤습니다. 내 동생들도 봤습니다.”

-고인이 뉴욕에서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려진 게 없구요.

“엄마는 뉴욕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2003년 7월 2일 뇌출혈로 쓰러지기 전까지 한국에서 데려온 강아지 다섯 마리를 데리고 허드슨강변을 산책하는 걸 정말 좋아했습니다. 늘 ‘뉴욕은 에너지가 넘치는 도시’라고 하셨어요. 동네에서도 유명인사였지요.”

천 화백이 기르던 다섯 마리 강아지는 1996년 경부터 한국과 뉴욕을 자주 오갈 때 한 마리씩 데려온 것이라고 했다. 강아지로서는 장수(長壽)인 17~18세까지 살다가 네 마리가 죽고 지금은 한 마리만 남았다고 이 씨는 전했다.

“(천 화백의) 뉴욕에서의 삶은 아주 평범했습니다. 혼자 커피도 끓여 먹고, 라면도 끓여 먹곤 하셨으니까요. (뉴욕)사교계에는 아무 관심이 없으셨어요. 혼자 성당에 가는 걸 좋아하셨지요. 백화점에 쇼핑을 하러 가도 ‘나 돈 없어’라고 하시면서 물건을 사는 경우가 거의 없었어요. 내가 ‘엄마, 내 통장에 돈 있어’라고 말해도 ‘괜찮아’라며 하며 뭘 사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1981년 작 ‘뉴욕 센트럴파크’ 그림에 대해 호평하는 뉴요커들을 저도 만난적이 있습니다.

“너무 추운 12월이었습니다. 센트럴파크 관광용마차를 끄는 마부에게 당시 돈으로 시간당 40달러(약 4만5200원)를 주고 2시간에 걸쳐 그린 그림입니다.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나도 너무 춥고 힘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천 화백이 무슨 비자로 미국에 장기체류했는지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996부터 2003년까지는 방문(B)비자로 뉴욕을 오가다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에는 영주권을 얻어 머물렀습니다. 제가 뉴욕에서 영주권자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병간호를 위해 미국 시민권을 얻었지요. 덕분에 엄마도 영주권자가 될 수 있었는데 당시 이민국 직원들이 집으로 와서 ‘영주권 심사’를 했습니다. 직원들이 ‘이렇게 훌륭한 분이 미국 주민이 되는 건 영광스런 일’이라고 말했던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2003년에 쓰러지셨다면 투병생활이 10년이 넘습니다.

“당초 의사는 ‘2개월 밖에 못 산다’고 했는데, 12년을 사셨습니다. 담당 의사가 엄마 사례를 익명으로 학회지에 보고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정도니까요. 의사는 매주 수요일마다 방문했고 물리치료사가 주 2회 찾아와 마사지를 해주고 갔습니다. 엄마는 ‘욕창(압박궤양)이 하나도 없는환자’로도 유명했습니다. 깨끗한 몸으로 돌아가셨지요. 저도 혈관주사만 빼고 웬만한 주사 놓는 법을 다 배웠습니다.”

이 씨는 “엄마 침대와 산소호흡기 2대 등 병원 못지않게 갖춰놓은 의료시설을 빼면 집안이 창고처럼 허름합니다. 밤에 2시간마다 깨어나서 엄마를 살펴야 하기 때문에 전 주로 의자에서 잤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아까 만났던 성당에 천 화백의 유해를 모셨나요.

“아닙니다. 다른 곳에 잘 모셨습니다. 엄마를 둘러싼 여러 문제가 다 정리되면 그 때 공개하겠습니다. 성당에선 장례미사만 올렸습니다. 신부님이 ‘경자 천(Kyungja Chun)이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느님이 ’그래(Yes)‘라고 하셨다’고 말씀해주셨을 때에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엄마 돌아가실 때에도 눈물이 하나도 안 났는데 그 말씀 듣는 순간엔 너무 좋아서 콸콸 쏟아졌습니다.”

칠순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던 이 씨는 이 대목을 전하며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천 화백은 장례미사 뒤 뉴저지의 한 장례시설에서 화장됐다. 이때 그는 1980년대 서울의 한 성당에서 구입한 수의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이 씨는 “엄마가 30여 년 전에 장만해서 미국으로 가져온 그 수의가 여전히 깨끗한 채로 있었다”고 했다.

이 씨는 “제 경제적 형편이 허락하는 선에서 고인에게 최고의 의료진과 최고의 장례를 선사했다”며 “장례비용으로만 1만 달러(약 1130만 원)가 넘게 들었고, 12년간 의료비를 대느라 빚도 많다”고도 했다.

이 씨는 “(건강했던) 엄마를 미국으로 모셔왔다가 그 유해를 들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일이 자식 된 도리로 가장 힘들었다. 혼자 해내기엔 너무 벅찬 일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간간히 동생들에 대한 섭섭함도 비췄다. 천 화백이 뉴욕에서 자신과 함께 살게 된 이유도 동생들이 ‘엄마를 모시기 힘들다’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란 거였다.

그는 “한번은 동생에게 ‘내가 집을 비워야 하니 하루만 엄마를 봐 달라’고 했는데도 학교 학부모회에 가야 한다며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엄마에겐 (동생들도) 모두 사랑스런 자식이 아닙니까. (나와 동생들 사이에) 분란이 생기길 원치 않습니다”고 말했다.

이 씨는 이날 기자에게 “앞으로 나에게 남은 일은 엄마의 유해와 작품을 지키는 것뿐”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작품을 지킨다는 의미가 무엇인지요.

“엄마는 (1998년) 그림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할 때 작품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렇게 아끼는 작품들을 일반 대중의 소유로 넘긴 것입니다. 엄마는 생전에 ‘난 일개 여류화가이다. 단 대중이 나를 좋아해준 것뿐’이라고 종종 말씀하곤 했습니다. ‘대중이 안 좋아해주면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엄마 작품은 대중의 것입니다.”

이 씨는 “엄마는 작품을 자식들에게 나눠 주는 것도, 작품이 시중에 팔려서 돌아다니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오로지 커피숍이 있는 작은 미술관 같은 곳에 다 모아놓고 대중들이 한번에 감상할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고 했다.

한때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그런 취지를 살리려고 화랑을 알아보다가 20억 원이 넘는 거액이 든다고 해서 포기했다고 한다. 실제로 천 화백은 그림 93점을 기증할 때 “내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일반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는 뜻을 밝혔었다.

이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도 화가로서의 엄마의 삶과 엄마 작품을 많이 좋아하셨습니다. 박 대통령께서 엄마에게 ‘천 화백, 막걸리나 같이 한잔 합시다’라고 얘기하곤 했다고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고 전했다.

그에게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5시간을 넘게 기자와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 뒤에도 3번이나 전화를 걸어 문득 다시 떠오랐다며 ‘엄마 천경자 화백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사진 찍는 것은 극구 사양했다.

▼‘자연적 원인으로 사망’ 증명서 첫 공개▼

뉴욕 위생국 8월 10일 발급

고 천경자 화백은 8월 6일 오전 5시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큰딸 이혜선 씨(70·섬유 디자이너) 아파트에서 사망했다고 이 씨가 밝혔다. 그러나 이 씨의 증언만 있을 뿐 공식적인 증빙문서가 공개된 적이 없어서 의구심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왔다.

이 씨는 26일(현지 시간) 기자와 단독으로 만난 자리에서 천 화백의 뉴욕시 사망증명서(Certificate of Death)를 처음 보여줬다. 이 증명서는 뉴욕시 보건정신위생국이 사망 4일 뒤인 8월 10일 오후 9시59분에 발급한 것으로 표시돼 있었다. 사망자의 법적 이름은 ‘Kuyngja Chun(경자 천)’이고, 생전 직업은 ‘화가(Painter)’이고 해당 산업 분야는 ‘미술(Art)’이라고 써 있었다. 출생지는 ‘한국(Korea)’이고 ‘생존해 있는 배우자나 파트너 이름’ 칸은 비어 있었다.

신고자(informant)는 ‘이혜선’이라는 이름으로 사망자와 관계는 ‘딸’이라고 적혀 있었다. 의사가 환자를 마지막으로 진료한 날은 사망 전날인 8월5일이다. ‘이 사망이 외상(外傷)이나 독약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그 외 어떤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발생한 것도 아닌, 전적으로 자연적인 원인(natural causes)에 따른 것임을 증명한다’는 내용과 주치의의 서명이 담겨 있다.

뉴저지의 한 장례시설에서 시신을 화장했다는 내용도 표시돼 있다. 이 씨는 ‘8월6일 사망한 천경자의 화장이 8월12일 완료됐다’는 내용의 장례 증명서도 기자에게 공개했다.

이 씨는 이들 증명서의 열람을 기자에게 허락하면서도 ‘증명서를 통째로 신문에 게재하지 말아 달라’고 강하게 요청했다. 그 이유에 대해 “부모의 사망 증명서가 그대로 공개돼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자식이 세상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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