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 ‘反美교과서’ 잡고 親中외교로 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5일 22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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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 득세"… '노무현 역사관' 국정화로 돌파
"反美면 어떠냐" 親中외교 유산 박근혜 정부가 계승한 이유 뭔가
중국을 G2로 인정 않는 미국… 親中견제 동참해 국익 키운 일본
한국은 '러브콜 착각'에 살 참인가

김순덕 논설실장
김순덕 논설실장
지금 생각하면 노무현 정부 때가 글쓰기는 제일 쉬웠다. 대통령이 끊임없는 ‘말 폭탄’으로 소재거리를 제공해줘서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역사를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다”고 못 박은 대통령이 그런 역사인식에 딱 맞는 법과 제도와 정책을 쏟아내는 바람에 정부비판 칼럼이 저절로 터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노무현 시대가 끝난 지 8년, ‘노무현 정신’을 내건 야당이 대통령선거에서 패한 지 좀 있으면 3년이다. 그런데도 빠지지 않는 대못이 깊고도 많다는 게 새삼 놀랍다.

역사 교과서도 그중 하나다. 2004년 국정감사에서 당시 야당이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의 친북 반미 편향성을 지적했을 때 노 정부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2008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하도록 나섰으나 다시 써도 마찬가지였다. 2011년 강규형 명지대 교수가 “차라리 편향성 없는 국정 교과서 체제로 복귀하는 게 낫다”고 했을 정도다. 또 개정 작업을 벌였지만 2013년엔 지금의 야당이 교학사 교과서에 대해 “5·16을 혁명으로 표현했다”고 거짓 공격부터 해댔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화 강행을 결심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 대한 인식이 역사를 보는 눈을 좌우한다. 유신 때 국정 교과서로 배운 50대 이상도 ‘국제시장’ 영화를 보고 대한민국의 성취에 눈물을 흘렸다. 지금 멀쩡한 젊은이들이 ‘헬(hell)조선’을 외치는 건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도 일자리 못 구하는 현 세태 때문이지 왜곡된 교과서로 배워서가 아닌 것이다.

그나마 국정화는 강행된대도 정권이 바뀌면 바꿀 수 있다. “반미(反美)면 어떠냐”고 밀어붙인 노 정부의 친중외교가 이명박(MB) 정부 때 180도 바뀌었다가 박근혜 정부에서 다시 돌아선 건 반(反)MB 정책이 아니면 뭔가 싶다. 이영작 전 한양대 석좌교수는 미국이 한국형전투기(KFX) 기술이전을 강하게 거부한 이유를 “노 정부 때 친중외교로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현 정부의 중국 경사론(傾斜論)도 만만치 않다.

물론 중국은 가장 중요한 교역 상대국이다. 북핵 해결이나 통일대박과도 유관한 강대국이라는 점도 안다. 하지만 미중을 일컫는 주요 2개국(G2)이라는 표현이 국제사회에선 사라지고 있다는 걸 이 정부도 아는지 의문이다.

꼭 10년 전 처음 등장한 G2라는 말은 2009년 미국이 세계안보와 경제현안을 중국과 논의하는 ‘전략 및 경제대화’를 시작하면서 ‘G2 시대 개막’으로 퍼지게 됐다. 그러나 중국이 남중국해 분쟁 등을 일으키며 새판짜기 야심을 노골화하자 2010년 미국은 ‘아시아로의 귀환’을 천명했다. 중국의 2인자 지위를 인정 못한다는 의미다.

이후의 현대사는 세계 패권을 노리는 중국과 경제적 자신감을 회복한 패권국가 미국의 ‘제국의 충돌’이다. 2012년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가 하필 미국 땅에서 중일(中日) 영토분쟁 중인 센카쿠 열도 매입 의사를 밝힌 것도 의미심장하다. 중일관계 개선을 모색하던 일본에 민족주의가 끓어올랐고 마침내 일본은 전쟁도 가능해진 미일 가이드라인 개정으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으로 미국과 한몸 같은 중국 견제의 첨병이 됐다. 일본이 엔화를 달러 대비 무지막지하게 떨어뜨려 수출 재미를 봤는데도 ‘환율조작’ 소리를 안 듣는 ‘보상’을 받은 반면 우리는 한미 정상회담 뒤 곤욕을 치른 이유도 여기 있을 터다.

최근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냉전 종식 후 유일 강대국 미국이 러시아와 시리아에서, 중국과는 남중국해에서 패권다툼을 벌이고 있다”고 썼다. 박 대통령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러시아와,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은 중국과 협력이 필수다. 일본이 지정학적 격변의 흐름과 미국의 세계 전략에 올라타 국가 목표를 이루고 국익을 확대하는 중이라면 우리는 거꾸로 헤매는 형국이다.

미국이 중국과 관계개선을 위해 대만을 버렸듯이, 한국도 미국의 전략에 따라선 방기(放棄)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김현욱 교수는 한미 정상회담 분석 보고서에서 “자주적 평화적 통일을 지지한다는 중국의 한반도 통일에 대한 태도는 한미동맹에 기반을 둔 통일을 반대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반미교과서는 바로잡겠다면서,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을 원치 않는 중국으로 치닫는 대통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피를 토할 노릇이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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