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사과 대자보’ 이후, 피해자-가해자 갈등 커진 이유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5일 21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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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본보가 단독 보도한 연세대 성폭력 사건의 처리 방식을 두고 피해자와 가해자 간 갈등이 커지고 있다. 지난달 후배를 성추행한 연세대 재학생 A씨가 사과 대자보를 실명으로 게시했지만 이후 피해자 측이 사과문 내용을 문제 삼고 나섰기 때문이다.

A 씨는 지난달 대학 후배인 피해자와 술을 마신 뒤 후배가 잠든 사이에 신체 일부를 강제 추행했다. 며칠 뒤 피해자가 이를 문제 삼자 범행 사실을 인정하고 실명으로 사과 대자보를 쓰기로 피해자 측과 합의했다고 한다. 그는 16일 실명과 학년, 학과를 적은 사과문을 교내 게시판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문제는 사과문 내용이었다. 당초 피해자 측은 구체적인 단체명을 밝히지 않는 선에서 A씨의 교내 활동 이력을 최대한 자세하게 적을 것을 요구했다. A 씨가 과거 학생회와 학내 진보단체 등에서 활동한 이력을 바탕으로 피해자와 신뢰를 쌓았고 이러한 관계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A씨는 “과거 이력은 이번 사건과 무관하다”며 거절했다. 사과문에는 ‘본인이 학내 이슈와 진보적 의제 그리고 성 평등 상담센터의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활동했다’는 내용만 적었다.

갈등은 피해자 측이 “불충분한 사과문이었다”는 입장문을 내면서 불거졌다. 이들은 19일 원고지 31장 분량의 입장문을 통해 “사과문에 요구사항이 완전히 담기지 않았다. 합의가 사실상 결렬됐다”고 밝혔다. 피해자를 돕고 있는 총여학생회 관계자는 “그동안 대학 내 성폭력 문제는 그 심각성에 비해 충분하게 논의된 적이 없었다”며 “가해자를 매도하는 걸 원한 것은 아니지만 재발 방지를 위해 공론화해야 한다고 판단해 입장문을 냈다”고 설명했다.

A씨는 일방적인 조치라는 입장이다. 사과문 내용을 미리 피해자 측에 보여주고 ‘게시해도 된다’는 답변을 받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총여학생회 소속 일부 학생이 자신의 아르바이트 장소까지 방문한 사실도 언급하며 “이후 사과를 받았지만 당시에는 위력 시위처럼 여겨졌다”며 “뒤늦게 사과문 내용을 문제 삼고 합의가 결렬됐다고 하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피해자의 고소를 접수한 서대문경찰서는 이번 사건을 수사 중이다. 혐의가 확인되면 A씨는 형사 처벌을 받게 된다. 학교 측도 A씨에 대해 학칙에 따른 징계 여부를 검토 중이다. 박찬성 서울대 인권센터 전문위원은 “대학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는 건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지만 실명이 공개된 상황에서는 당초 의도와 달리 논의가 가해자를 겨냥할 수밖에 없다”며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실명 공개는 매우 신중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김호경 기자 whalefish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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