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책상 위 작은 우주… 문구의 탄생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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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의 모험/제임스 워드 지음·김병화 옮김/376쪽·1만6000원·어크로스
종이 아닌 가상 메모장 사용하는 요즘 희소해지는 아날로그 감성 떠올리게 해
예술가가 사랑한 문구 이야기도 흥미로워

자, 크레용, 스테이플러, 지우개, 클립 등 형형색색의 온갖 문구들. 저자는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문구의 다양한 면모를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다. 마치 문구에 대한 잡학사전을 읽는 것 같다. 어크로스 제공
자, 크레용, 스테이플러, 지우개, 클립 등 형형색색의 온갖 문구들. 저자는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문구의 다양한 면모를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다. 마치 문구에 대한 잡학사전을 읽는 것 같다. 어크로스 제공
‘한 손엔 수첩, 다른 한 손엔 아이패드(칼과 코란은 부담스럽다).’

필자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중간 세대인 1990년대 중반 학번이다. 10년 전만 해도 취재수첩과 볼펜을 항상 들고 다녔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실시간으로 클라우드 서버에 글을 저장할 수 있는 메모 애플리케이션(앱)을 사용했다. 자연스레 수첩과 볼펜은 멀어졌다. 그런데 출입처가 긴 학술 논문을 자주 읽어야 하는 곳으로 바뀌고 나서 문방사우(文房四友)는 죽마고우(竹馬故友)로 다시 돌아왔다. 메모 앱에도 ‘하이라이트’ 기능이 있지만 중요한 문장을 따로 표시해 요점을 추리기에는 역시 볼펜과 포스트잇만 한 게 없었다. 인쇄된 종이 위에 빨간색으로 직접 긋고 소위 ‘돼지꼬리’ 정도는 날려 줘야 일할 맛이 나는 건 학창 시절의 오랜 습성 때문일까. 그것은 저자가 책 말미에 언급한 ‘IT 기기로 느낄 수 없는 문구만의 독특한 물리적 경험’과 다름없을 것이다.

이 책은 ‘문구광(狂)에 의한, 문구광을 위한’ 기록이다. 클립부터 볼펜, 종이, 스테이플러, 지우개까지 오로지 문구의 세계만을 다뤘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땐 ‘이 흔한 소재로 책을?’이라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기우였다. 저자는 ‘지루함 콘퍼런스(Boring conference)’를 매년 개최하는 괴짜다. 이 대회에서는 재채기를 할 때마다 일일이 강도를 기록하거나 여러 자판기들의 소음을 녹취해 비교하는 사람들이 참가한다.

영국의 ‘딕슨 타이콘데로가’ 연필.
영국의 ‘딕슨 타이콘데로가’ 연필.
순간의 평범한 일상에서 그 나름의 독특한 의미를 찾는 저자는 이 책에서 문구들의 역사와 탄생 배경을 자세히 풀어 놓고 있다. 생활용품에서 사회 전반의 흐름을 읽어 내는 민속학의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종이 클립’이다. 1899년 노르웨이의 요한 볼레르가 처음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종이 클립은 19세기 후반 수십 개의 디자인 특허가 난립했다. 이는 관료제가 심화되면서 사회 전반에 문서주의(red-tape)가 만연해진 데 따른 것. 이와 함께 여러 문서를 집어내는 탄성을 가진 동시에 대중이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값싼 철사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당시에 개발된 것도 주효했다.

재밌는 것은 유명한 문사(文士)들 중에도 문구광이 꽤 많았다는 사실이다. ‘분노의 포도’를 쓴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1902∼1968)은 고급 연필인 ‘블랙윙 602’ 마니아였다. 일반 연필보다 3배나 비쌌지만 그는 작품을 쓸 때마다 블랙윙 602를 고집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으로 유명한 영국 작가 로알드 달(1916∼1990)도 아침마다 ‘딕슨 타이콘데로가’ 상표의 연필을 여섯 자루 정도 깎은 뒤에야 집필에 들어갔다고 한다. 스타워즈의 감독 조지 루커스도 이 연필로 시나리오 초고를 썼다.

자출족(자전거 출퇴근족)이 자주 쓰는 격언에 ‘잔차(자전거)는 엔진(다리 힘)이 생명’이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글쓰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집중력이지 필기도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문구광들의 생각은 좀 다른 듯하다. 앞서 스타인벡이 흠뻑 빠졌던 블랙윙 602는 요즘 이베이에서 한 자루에 3만∼4만 원에 거래되고 있다. 해당 제조사가 문을 닫아 희소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정한 문구광들은 이 비싼 연필을 수집하려는 게 아니라 직접 쓰기 위해 구입한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문구의 모험#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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