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위해” 제살 깎은 伊… “동료 위해” 의석 늘리자는 한국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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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정치개혁과 한국]伊, 상원의석 215석 어떻게 줄였나

《 13일 상원의원 수를 315석에서 100석으로 70%나 줄이는 개헌안을 통과시킨 이탈리아 정치 개혁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외신들은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밥그릇을 던지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에 대해 ‘경이적인 일’이라며 놀라고 있다. 이탈리아는 정치야말로 경제의 발목을 잡는 주범이라며 국회를 개혁하지 않고는 국가 개혁이 있을 수 없다는 목표의식 아래 의원들 스스로 수를 대폭 줄이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과연 이탈리아는 어떻게 개혁에 성공했을까. 》

상원의원 수를 315석에서 100석으로 대폭 줄이는 이탈리아 헌법 개혁안은 앞으로 하원도 통과해야 하고 국민투표 절차도 남아있다. 하지만 밥그릇을 빼앗길(?) 당사자들인 상원의원들이 법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관문을 넘었으며 무엇보다 국민 여론이 압도적 찬성이어서 최종 통과까지는 어렵지 않아 보인다. 이탈리아 정치 개혁의 내용과 배경을 살펴본다.

○ 많아도 너무 많았던 국회의원 혜택

이탈리아 국회의원은 상원 315명, 하원 630명으로 총 945명이나 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수적으로 2위이고, 대우도 최고 수준이다. 의원의 한 달 수입이 우리 돈 2200만 원가량. 월급 1600만 원에 야근비 600만 원을 꼬박꼬박 매달 받아 간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의원 연봉은 남유럽에 비하면 세 배 높은 수준이고 잘사는 독일과 비교해서도 두 배 높은 수준이다.

공식 세비 외에도 혜택이 넘친다. 전화요금으로 연간 400만 원을 나라 예산에서 지급받을 뿐 아니라 대중교통이 공짜고 극장 수영장 축구경기장도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외국어 학습을 위해서도 총 40만 유로(약 5억1570만 원)의 예산이 배정돼 있다. 여기에 상원의원들은 명품 브랜드 나자레노가브리엘리사가 디자인한 다이어리를 지급받고 이발도 무료다. 국회에서 일하는 이발사 연봉이 우리 돈 1억8000만 원에 달한다.

이탈리아 경영자총연합회는 “국회와 지방의회에서 활동하는 정치인들을 지원하는 데에만 1년에 총 90억 유로(약 11조6032억 원)가 드는데 이는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과 맞먹는다”고 국회를 맹비난하기도 했다.

○ 독재적인 의회 권력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에 베니토 무솔리니와 같은 파시스트 독재자가 출현하지 않도록 모든 법률과 예산안을 통과시킬 때, 또 새 정부 총리가 취임할 때 상하 양원이 모두 승인을 해야 한다는 막강한 견제 장치를 도입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고질적인 정치 불안과 개혁 불임(不姙)을 낳는 원인이 됐다. 이탈리아에서는 지난 69년 동안 무려 63번의 새 정부가 들어섰고, 27명의 총리가 취임했다. 잦은 정권 교체로 개혁은 좌절됐고 장기적인 국가 발전 계획은 언감생심이었다.

2013년 총선에서는 하원에서 중도 좌파가 과반에 달하고 상원을 중도 우파가 장악하는 바람에 어떤 정당도 총리 후보를 지명하지 못해 60여 일간이나 총리직을 공석으로 비워 두는 등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엔리코 레타 총리가 대연정 내각을 구성한 뒤 겨우 취임했지만 10개월여 만에 중도 하차했다.

○ 자기 살 도려내기, 쉽지 않았다

이번에 통과된 상원 축소 개헌안은 야당은 물론이고 집권당 내부에서조차 반발이 거셌다. 한 야당 의원은 토론 도중에 국화꽃을 던지며 “이탈리아의 민주주의가 죽어 가고 있다”고 외치기도 했다.

노회한 상원의원들은 시간을 질질 끌며 의사 진행을 방해하는 ‘필리버스터’ 전략을 썼다. 극우 정당인 ‘북부동맹’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똑같은 내용의 법안들을 이름과 문장만 다르게 하는 방식으로 무려 8200만 개의 수정안을 제출했다. 모든 수정안을 검토한 뒤에야 투표가 이뤄지는 시스템을 이용해 수정안 ‘쓰나미’로 개혁안을 봉쇄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이 대목에서 개혁을 주도한 마테오 렌치 총리의 순발력이 돋보였다. “필리버스터는 정치개혁을 향한 국민의 바람을 봉쇄하는 술수”라며 법안들을 소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본회의에 바로 상정한 것.

의원들에 대한 설득 작업도 집요했다. 렌치 총리는 34세의 여성인 마리아 엘레나 보스키 헌법개혁장관과 함께 315명에 달하는 상원의원을 일일이 만나 “지금 우리나라에는 더 적은 정치인과 더 많은 정책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개혁안에 반대하는 강경파는 공천에서 배제할 것”이라는 채찍도 휘둘렀다. 이 과정에서 보스키 장관은 외모를 놓고 외설적인 발언까지 해 대는 반대파의 모욕도 견뎌야 했다. 현지 일간 코리에레델라세라는 “불가능한 미션처럼 보였던 개헌안 통과에는 우아한 매너와 미소로 최전선에서 굳세게 버텨 낸 보스키 장관의 역할이 컸다”고 보도했다.

대국민 설득 작업도 부지런히 했다. 렌치 총리는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이번에 개헌안이 통과되면 ‘유럽의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인 이탈리아가 깨어날 것”이라고 하는 등 미디어를 통한 대국민 소통에 나섰다. 마침내 본회의 투표 당일, 100여 명의 의원이 투표를 거부하고 회의장을 나가 버렸지만 법안은 179표 찬성으로 통과됐다.

○ 개혁을 하려면 직(職)을 걸어라

취임 후 18개월 동안 노동, 공공, 사법, 은행, 교육 등 전방위 개혁 작업에 나서고 있는 렌치 총리는 노동법 교육법 선거법 개정 때마다 자신의 직을 건 신임 투표도 불사하며 승부수를 던졌다. 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총리직을 사임하고, 조기 총선을 하겠다는 ‘사즉생(死則生)’ 전략이다. 이번 상원 축소 개헌안도 자신이 속한 집권 민주당이 상원에서 과반수에서 10석이나 부족해 통과에 실패할 경우 사임해야 하는 위기상황이었지만 과감하게 밀어붙여 성공시켰다.

개헌안이 통과된 4일 후인 17일 여론조사에서 렌치 총리 지지도는 44%로 4%포인트 상승해 현재 이탈리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라는 명성을 이어 가고 있다. 집권 민주당도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이탈리아#정치개혁#의원정수#마테오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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