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신석호]‘전략적 인내’를 위한 변명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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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호 워싱턴 특파원
신석호 워싱턴 특파원
지난주 금요일 오후 4시 반경 초등학교 학생들의 하굣길에 스쿨버스가 마을 어귀에 멈춰 움직이지 않으면서 교통 대란이 일어났다. 가장 먼저 내리고 타는 킨더(미국 초등학교가 입학 1년 전부터 아이들에게 제공하는 유치원 과정) 학생 가운데 한 명인 에밀리가 내리려 하자 할머니 운전사가 “부모가 올 때까지 차에서 내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사달이 시작됐다.

초등학생들은 부모 없이도 내릴 수 있지만 킨더 학생들은 운전하는 선생님이 “에밀리” 하고 부르면 부모가 문 앞에서 대답을 해야 내릴 수 있다. 옆집 엄마가 “대신 받겠다”고 했지만 운전사는 “원칙은 원칙”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스쿨버스가 아이들을 태우고 내릴 땐 사방으로 차들이 다닐 수 없다. 긴 차량 행렬이 늘어섰다. 차를 몰고 장을 보고 오다 그 속에 갇혔던 에밀리 엄마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원인이 자신임을 깨달았다.

현장을 지켜본 기자의 아내는 “원칙을 지키려고 고집을 꺾지 않은 운전사 할머니도 그렇지만 묵묵히 참으며 10여 분을 기다렸던 승용차 운전자들 중 어느 누구도 경적을 울리거나 항의하지 않았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2012년 2·29합의가 깨진 이후 4년 가까이 북한과 이렇다 할 대화와 협상에 나서지 않고 있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전략적 인내’ 정책도 이런 깐깐한 ‘원칙주의’ 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16일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가 이란과 핵협상에 나선 것은 핵을 포기하겠다는 이란의 의지를 확인했기 때문”이라며 북한이 핵을 포기하겠다는 진정성을 보여야 대화에 나설 수 있다는 원칙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재확인했다. 미국은 언제든지 북한과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지만 먼저 북한이 주먹을 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란 핵협상처럼 ‘될 것 같은 일’에만 손을 대는 선택과 집중의 통치 스타일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오바마 대통령이 집권 2기를 1년 남긴 현재까지 건강보험 개혁(오바마케어),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 이란 핵협상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국내외 주요 추진 사업들을 모두 성사시킨 것은 ‘될 일과 안 될 일을 구별하는 지혜’ 덕분이기도 하다.

이미 세 차례의 핵실험을 했고 헌법에 핵국가임을 명시한 북한이 어느 날 갑자기 핵·미사일 프로그램 개발을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미국인은 이제 없는 것 같다. 오바마 대통령도 그런 미국인이다. 북한의 명줄을 쥐고 있는 중국이 독한 마음을 먹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의 힘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 인식도 확산되고 있다.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며 자유를 갈망하는 인민들의 힘이 끝내 낡은 3대 세습 독재 체제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믿음 역시 미국이 북핵 문제에 태연할 수 있는 배경일 수 있다. 2013년 김정은이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했을 때와 올해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고사포에 맞아 죽었을 때 미국의 전문가들은 “이제 곧 저 잔인한 체제의 끝이 올 것”이라며 북한붕괴론을 공공연하게 입에 올리기도 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남한이 주도하는 한반도 통일에 대해 적극 지지 의사를 표명한 것도 그런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성공한 체제 남한이 실패한 체제 북한을 끌어안는 것은 역사적인 필연이라는 점을 미국 최고지도자가 확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핵을 포기하지 않는 김정은에게 더 나은 미래는 없을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전략적 인내’를 유지시켜 주는 진짜 힘이라는 생각이다.

신석호 워싱턴 특파원 kyle@donga.com
#전략적인내#교통대란#스쿨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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