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영식]탈북 망명유학생의 쓸쓸한 퇴장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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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정치부 차장
김영식 정치부 차장
검은색 외투에 중절모를 쓴 그는 뭐랄까, 저돌적이었다.

“안녕하시오”라는 짧고 건조한 첫인사. 곧바로 렌터카 데스크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세 곳의 가격을 다 비교해 보고 제일 경제적인 차를 골랐다.” 짙은 함경도 사투리.

“내가 준비하라고 한 서류는 다 준비했지? 지금 선생이 4개를 냈으니 나중엔 4개를 다 받아야 한다.” 말투와 행동 모두 거침이 없는 첫인상은 강렬했다.

이상종 박사를 만난 건 2011년 12월 중순 불가리아의 소피아 공항에서였다. 우연이라면 우연이었다. 당시 ‘사라지는 세계 장수촌’이라는 신년 특집 기획기사를 준비하기 위해 출장에 나서면서 불가리아 주재 한국대사관에 통역하실 분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대사관 관계자는 “젊은 분과 나이 드신 분이 있는데 누가 좋겠냐”고 했다. 나이 드신 분이 좋다고 했다. 현지 경험이 많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였다. 그러자 예상치 못했던 추가 설명이 이어졌다. “예. 참고로 그분은 북한 출신입니다.”

함경남도 영흥군(현 금야군) 출신인 이 박사는 북한 체제에서 촉망받던 과학도였다. 1956년 9월 불가리아 소피아대에 입학한 그는 1962년 8월 동료 북한 유학생 이장직, 최동준, 최동성 씨와 함께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냉전이 치열하던 1962년 김일성 당시 북한 수상의 유일지배 독재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6·25전쟁은 북한이 일으킨 침략전쟁이고 북한이 말하는 경제개발계획은 허구이며 김일성 선집보다는 성경을 읽는 게 낫다는 요지였다.

이 박사는 그 이후의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불가리아 북한 청년동맹 회장을 맡았던 내가 그런 성명을 냈으니 북한 노동당에서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겠지. 북한이 발칵 뒤집혔어. 유학생 4명 모두가 불가리아 주재 북한대사관에 끌려갔지. 8월 5일에 끌려갔다가 9월 27일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면도칼로 카펫을 찢어서 묶은 뒤 창문 밖으로 내려와서 도망쳤어.”

그렇게 북한 유학생들은 불가리아로 망명했고, 양국은 6년간 교류를 중단했다.

나중에 그가 알게 된 사실은 불가리아의 논문 지도교수와 학장들이 그가 북한에 끌려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항과 검문소 등을 감시했다는 것이다. 한 친구는 망원경으로 북한대사관의 움직임을 지켜봤다고 했다.

그는 불가리아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약 30년간 망명자로 살았다. 한국과 불가리아가 수교하자 1992년 1월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 박사의 얘기를 꺼낸 것은 그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뒤늦게 전해 듣고 안타까운 마음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그를 마지막으로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불가리아 유학생 4명 모두가 이젠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

그와 함께 불가리아 장수촌을 구석구석 돌아다닐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아들인 김정은이 3대 세습으로 권력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뉴스가 나오자 이 박사는 “일가족이 아닌 사람이 권력을 잡았다면 북한이 새로운 정책을 펼 수도 있겠지만…. 가족이 권력을 잡았으니 자기 할아버지, 아버지가 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가겠지”라고 했다.

최근 진행된 북한의 노동당 창건 70주년 열병식을 보면서도 그의 예상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용이 무려 14억 달러(약 1조6079억 원)로 추정될 정도로 많은 인력과 장비를 동원한 과거지향형 행사였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인민’을 97번이나 언급할 정도로 강조했지만, 진정으로 인민을 위하는 길은 군사력 강화와 선전보다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닐까.

김영식 정치부 차장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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