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 “인민” 97회 외쳤지만… 눈물 흘리는 인민 거의 안보여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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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열병식 이후]김일성대 출신 주성하 기자가 본 열병식

‘지뢰 도발’ 김영철 건재 과시… 열병식 주석단에 북한의 지뢰 도발에 책임이 있는 김영철 북 정찰총국장(오른쪽 원 안)이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열병식에 참석해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조선중앙TV 화면 캡처
‘지뢰 도발’ 김영철 건재 과시… 열병식 주석단에 북한의 지뢰 도발에 책임이 있는 김영철 북 정찰총국장(오른쪽 원 안)이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열병식에 참석해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조선중앙TV 화면 캡처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열병식은 북한의 쇠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수십 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행사 조직력은 여전했지만 동원된 사람들은 허약했고 장비는 낡아 보였다. 주석단에 등장한 외국 사절은 류윈산(劉雲山)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유일했다.

○ 허약한 병사들

열병 행사 시작 전 교도통신을 통해 북한 군인들이 행렬을 지어 행사장에 입장하는 한 장의 사진이 공개됐다. 드디어 고생이 끝났다고 생각해서인지 군인들의 표정은 밝았다. 하지만 대열 속 곳곳에선 영양실조에 걸린 것으로 보이는 병사들의 모습이 포착됐다. 키가 160cm도 안돼 보이는 병사도 적지 않았다. 북한군의 현재 상황을 백 마디 말보다 더 잘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이었다. 씩씩한 열병식과는 별개로 북한군의 영양 공급이 여전히 열악하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다.

김일성광장 앞을 꽃다발을 흔들며 지나가던 평양 시민들의 얼굴엔 아직도 햇볕에 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꽃다발로 광장에 여러 글씨를 만드는 훈련도 보통 3개월 동안 진행된다. 평양시민들은 유달리 가물고 더웠던 올여름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하루 종일 신호에 따라 색깔별로 꽃다발을 올리고 내리는 훈련을 했을 것이다.

김정은은 열병식 시작 전에 한 연설에서 ‘인민’이란 단어를 97차례 강조했다. 하지만 인민은 이번 열병식을 위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지나가는 대열마다 말해주는 듯했다. 그래서였을까. 꽃다발을 흔들며 지나가는 대열에서 과거처럼 눈물 흘리는 시민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 나이 든 간부들 불안에 떨 듯

이번 열병식에서 또 하나 눈에 띄었던 점은 제일 마지막 대열이 소년단 학생들이었다는 점이다. 소년단은 14세 미만의 학생이 가입하는 소년 조직이다. 지금까지 북한은 열병식에서 소년들을 동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소년들을 등장시켜 만주에서 시작된 혁명 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여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연설을 통해 ‘인민중시, 군대중시, 청년중시’라는 노동당의 3대 전략을 제시했는데 청년중시를 노동당 전략에 포함시킨 것도 매우 이례적이다. 김정은이 자기의 나이에 맞게 노동당의 세대교체를 단행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젊음’을 강조한 김정은의 연설을 들은 수많은 노(老)간부들은 당에서 나이 든 간부를 몰아내고 젊은 간부로 세대교체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졌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을 것으로 보인다. 열병 행렬 마지막에 나타난 소년단은 그야말로 ‘세대교체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으로 최근 ‘장마당세대’의 등장과 더불어 청년들 속에서 김정은에 대한 인기가 크게 떨어지는 것도 북한 당국이 청년 계층을 다독이고 내세워야 하는 이유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 눈길 끌지 못한 무기들

이번 열병식은 과거 북한이 진행했던 다른 열병식에 비해 규모나 장비 면에서 눈길을 끌지 못했다. 1985년 광복절과 1992년 김일성 80회 생일을 맞아 진행된 열병식이 규모와 장비 면에서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동원된 군 장비는 300mm 방사포와 미사일을 제외하면 30년 전 열병식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열병식에 등장한 무인기는 몇 년 전 김정은이 직접 발사 장면을 지켜보는 모습이 공개된 바 있다. 당시에도 형태만 무인기이지 발사돼 그냥 앞산까지 날아가 들이박히는 포탄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공군이 벌인 에어쇼 역시 북한의 현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40년대 개발된 구식 야크기와 AN-2 항공기들이 노동당 마크와 70이란 숫자를 새기며 날개를 기우뚱기우뚱 흔들며 날았다. 2년 전엔 고려항공 수송기에 군용 얼룩무늬를 새로 칠해 군용기로 둔갑시키기도 했지만 이번엔 그런 성의조차 없었다. 북한 공군은 이번 열병식을 통해 에어쇼조차 할 능력이 없다는 것, 또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군용기도 거의 없다는 것을 드러낸 셈이다.

탱크와 자주포 같은 다른 군용 장비도 과거에 비해 많지 않았다. 수개월 동안 훈련을 하려면 막대한 연료가 필요한데 열악한 북한의 사정을 감안하면 기계화 장비를 대규모로 동원할 연료도 부족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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