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난 사람]진학 포기 아픔이 만든 장학재단… 어느새 215억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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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현 MDM·한국자산신탁 회장

“죽을 때 가져갈 것도 아닌데 부지런히 사회에 돌려줘야죠.” 문주현 회장은 자신이 그동안 얻은 건 모두 사회 덕분이라고 했다.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시작했던 그의 도전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죽을 때 가져갈 것도 아닌데 부지런히 사회에 돌려줘야죠.” 문주현 회장은 자신이 그동안 얻은 건 모두 사회 덕분이라고 했다.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시작했던 그의 도전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 ‘오늘은 비가 안 오나.’ 요 며칠 땡볕에서 농사일에 미역 양식까지 온갖 일을 하다 보니 온몸이 쑤셔댔다. 하늘도 찌뿌듯한 게 잘하면 비가 쏟아질 거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방구들에 드러누워 버렸다. “주현이 너 뭐 하냐! 언능 밭에 안 나가 보고!” 예상대로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지만 이렇게 살다간 아버지 같은 가난한 농사꾼밖에 더 되겠나, 그러면 내 자식들도 결국 그렇게 살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
국내 디벨로퍼(부동산개발업체) 1세대로 성공신화를 써가고 있는 MDM·한국자산신탁 문주현 회장(59)의 청소년 시절 얘기다. 전남 장흥에서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문 회장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학교를 다니는 형들을 대신해 3년 동안 집에서 농사와 김, 미역 양식을 해야 했다. 문 회장은 당시를 “노예생활 같았다”고 회고했다.

7일 오전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카이트타워 20층 집무실에서 문 회장을 만났다. 집무실은 각종 설계도면과 건물 모형들로 가득했다. 한쪽 벽면에는 그가 2001년 설립한 문주장학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보낸 감사 편지가 담긴 커다란 액자가 세워져 있었다. 최근 30억 원을 추가 출연해 장학재단 자본금은 215억 원으로 늘었다. 그동안 이 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은 학생만 1600명이 넘는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그는 어린 시절 얘기를 먼저 꺼냈다. 장학재단을 만들고, 끊임없이 기부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말 그대로 죽도록 일만 해야 했던 ‘노예생활’을 하던 어느 날 TV에서 직업훈련원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다. ‘탈출’할 기회였다. 1년 과정의 광주직업훈련원 기계과에 원서를 냈다. 경쟁률이 10 대 1이었다. 지원자 중에는 고등학교를 이미 졸업한 사람이 절반이나 될 정도로 당시엔 훈련원이 인기였다. 시골에서 농사짓던 문 회장에겐 새로운 세상이었다. 줄곧 1등이었다.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훈련원에서 새로운 눈을 뜨긴 했지만 30년 후 내 모습을 상상해 봤습니다. 판을 통째로 바꾸지 않으면 잘해야 공장장 돼 있는 게 내 미래 모습이었습니다.”

딱히 큰 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뭘 하더라도 대학은 나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당시 형편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친구들은 물론이고 가족들마저 코웃음을 쳤지만 아버지만이 “주현이 너는 해낼 수 있을 거다”라며 아들을 밀어줬다.

“스물이 넘어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군대를 제대한 후 하루 15시간씩 공부를 해서 스물여섯에 간신히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후배 집에 얹혀살며 생활비를 벌면서 공부를 하는데 3학년 때 한 독지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때 나중에 돈을 벌면 나도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경희대 회계학과를 졸업했지만 이미 서른을 넘긴 늦깎이를 받아주는 회사는 없었다. 1987년 가까스로 연매출 200억 원 정도의 나산실업에 공채 1기로 입사했다. 거기서 만난 나산의 안병균 회장은 그의 인생에서 또 한 번 판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됐다. 그는 안 회장을 인생의 스승으로 부른다.

“서른이 넘은 저를 뽑아 준 회사가 너무 고마워 주말, 휴일 없이 미친 듯이 일을 했습니다.” 회계학 전공이라 경리과로 배치됐지만 그는 영업을 자원했다. 주변에선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에겐 영업, 마케팅이 더 매력적이었다. 입사 6년 만에 7번이나 특진을 하면서 30대에 최연소 임원이 됐다. 회사도 재계 30대 그룹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대학 시절 폐결핵으로 고생한 적이 있는 몸에 다시 이상이 왔다. 숨이 차고 피를 토했다. 대학 시절 1년 반 가까이 보건소에서 약을 받아 치료했지만 그때 제대로 치료 받지 못한 데다 과로가 이어져 폐결핵이 재발한 것이다. 1년간 고향에 내려가 요양을 했다. 거기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가족에 대한 미안함에 삶의 의지를 다시 일깨웠다. 그 1년이 자신의 내면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고 했다. 문 회장은 “몸이 회복된다면 좀 더 당당하게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시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회사가 부도가 났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그는 대기업들의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치고 이듬해 서울 서초동 33m²짜리 원룸에 분양대행업체를 차렸다. 수중에 있던 5000만 원이 전부였다. 국내 최초의 시행업체였다. 그가 가진 건 ‘아이디어와 열정, 그리고 도전정신’뿐이었다.

문주장학재단의 도움을 받은 학생들이 보낸 감사 편지.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문주장학재단의 도움을 받은 학생들이 보낸 감사 편지.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첫 사업인 경기 성남시 분당구 미금역 근처 주거용 오피스텔 분양에서 대박이 나면서 대형 건설사들의 분양 의뢰가 이어졌다. 당시 주거용 오피스텔이라는 개념을 국내에서 처음 도입한 것도 그였다. 부산 해운대구 대우 월드마크센텀 시행에 이어 판교, 송파, 광교 등에서 그가 손을 댄 곳마다 대박 행진이 이어졌다. 주로 안 팔리는 땅이나 미분양 아파트 등을 최고의 인기 상품으로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경쟁업체와 뚜렷하게 차별화된다. 그동안 그가 판 집은 어지간한 신도시 규모인 4만여 채나 된다. 분양 금액으로는 14조 원에 이른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판을 바꾸기 위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은 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판을 바꾸는 도전은 간절함 때문이었다고 했다. 문 회장은 2010년 한국자산신탁을 인수할 때는 하나은행과 경쟁했고, 지금 회사가 있는 역삼동 카이트타워를 매입할 때는 삼성생명과 맞붙어 이겼다.

창업 3년 만인 2001년, 대학 시절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그때까지 번 회사 이익의 절반인 5억 원을 쾌척했다. 직원들은 “회사를 더이상 안 하려고 하는 것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마흔다섯이었던 문 회장은 그때 환갑 전까지 재단 자본금을 100억 원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는데, 벌써 목표를 2배 넘어섰다.

“제가 잘된 건 제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분양에 응해준 소비자들이 있었고, 돈을 빌려준 은행이 있었고, 열심히 일해준 직원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사회가 나를 도와줘서 이룬 것입니다. 죽을 때 다 놓고 갈 텐데 부지런히 사회에 돌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주장학재단의 장학금 지원 최우선 기준은 가정 형편이다. 한 명에게 지원하더라도 전액을 지원한다. 그 대신 일정한 성적은 유지해야 한다. 그가 세운 원칙이다. 그는 시골의 한 결손가정 중학생이 보내 온 편지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장학금 30만 원을 지원했는데 할머니는 손녀가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을 받은 걸로 여겨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아이는 할머니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다짐을 편지에 담았다.

문 회장의 사회 환원은 장학금이 전부가 아니다. 지난해 서울시청 지하 1층 시민청에 마련된 ‘서울책방’이 다시 문을 연 건 문 회장이 기부한 1억 원 덕분이었다. 2012년 서울 관악구청 1층에 마련된 ‘용꿈 꾸는 작은 도서관’도 그의 기부를 통해 탄생했다. 이 도서관은 개관 3년이 채 안 돼 50만 명 가까이 찾은 명소가 됐다. 국내에서 처음 만들어진 여자바둑대회도 그가 내놓은 2억 원이 토대가 됐다. 재작년 3월 서울시탁구협회장을 맡은 그는 우수한 성적을 거둔 초중고교 탁구 선수 3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탁구는 그가 가난한 대학생 때 유일하게 즐긴 취미였다. 모교인 경희대에는 매년 1억 원 이상 기부한다. 한 번은 전남 장흥에서 의료봉사를 하는 경희의료원 의료진 40여 명을 초청해 식사를 하다 의료장비를 싣는 버스가 낡았다는 얘기를 듣고 즉석에서 1억 원을 내놓기로 약속했다.

디벨로퍼는 부동산업계에선 흔히 ‘종합예술가’로 불린다. 어떤 땅을 사야 할지, 어떤 건물을 지어야 할지, 어떻게 고객에게 판매할지 등을 모두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2010년 문 회장이 공기업 민영화 1호 매물로 나온 한국자산신탁을 인수할 때는 우려의 시각이 많았다. 지금은 대형 건설사도 ‘디벨로퍼(부동산개발업체)’로 변신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디벨로퍼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있던 때다. 하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1년 만에 신규 수주 실적과 순이익 면에서 업계 1위를 만들었다. 올해 수주액(8월 말 기준)은 957억 원으로 부동의 1위였던 한국토지신탁(647억 원)을 앞질렀다. 수탁자산은 15조 원에 이른다. 내년에는 증시 상장도 예정돼 있다.

한때 1000여 개에 이르던 부동산개발업체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지나면서 크게 줄었다. 디벨로퍼 1세대 중 시장에서 검증을 받아 승승장구한 사람은 문 회장을 포함해 손가락으로 간신히 꼽을 정도다. 이 때문에 문 회장은 지난해 국내 최대 디벨로퍼 단체인 ‘한국부동산개발협회’ 3대 회장에 취임했다. 회원사는 350여 개에 이르지만 실제 활동하는 곳은 50개 남짓이다. 7일 서울 강남구 영동대로 코엑스에서 열린 협회 창립 10주년 기념행사에서 문 회장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고, 침체된 국가경제에 새바람을 불어넣는 게 디벨로퍼들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말했다. 요즘 그는 복원된 5.8km의 청계천이 서울의 도시 경쟁력을 높이는 데 기여했듯이 금융과 벤처기업이 몰려 있는 강남 테헤란밸리를 새롭게 재생시켜 세계적인 경제 문화 거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년이면 이순(耳順)이지만 그는 여전히 ‘꿈’을 얘기했다. “학교에 기부하고 장학금을 주는 걸로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힘들다고 봅니다.” 문 회장은 요즘 그동안의 ‘판’과 전혀 다른 ‘통 큰’ 기부를 해서 경제적으로 낙후한 한 지역을 통째로 살리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꿈에는 한계가 없다. “간절하게 꿈을 꾸고, 끊임없이 도전해야 합니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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