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광표]꿈꾸는 법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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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표 정책사회부장
이광표 정책사회부장
사람들은 ‘당구 명인’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중학교 2학년생이 자신의 꿈을 ‘당구 명인’으로 표현한 그림이었다. 더러는 껄껄 웃었다.

“아니 이걸 중학교 2학년 아이가 그렸다고요? 어떻게 이런 그림을. 당구장에 많이 다녀보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그림인데….”

당구대에 걸터앉아 당구에 여념이 없는 젊은 여성, 그 옆 소파에 앉아 자장면을 시켜 먹고 있는 두 청년, 자장면 옆에 놓인 답뱃갑과 요구르트까지 당구장 내부 모습은 세세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쳤다. 잠시 후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웃을 일이 아니지요. 우리가 보면 재미있지만, 이 아이 부모가 보면 어떻겠습니까? 속 터질 일 아니겠어요?”

지난주 청소년의 꿈을 만날 수 있는 전시회에 다녀왔다. 한국폴리텍대가 개최한 ‘미래 내 모습 그리기 대회’ 수상작 전시였다. 전국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1만1000여 점을 공모해 수상작 240점을 선보인 자리였다.

과학자, 의사, 법조인, 학자, 교사, 간호사, 군인, 경찰, 디자이너 등 우리에게 익숙한 꿈이 다수였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는 참신하고 구체적인 꿈도 적지 않았다. 양봉 전문가(초등1),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원(초등5), 음향조명 엔지니어(초등6), 경마 기수(중3), 유엔평화유지군(고1), 원예심리치료사(고1), 남북 문화통일을 위해 공연하는 무용수(고1) 같은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단연 ‘당구 명인’이었다. 중학교 2학년 아이가 미래의 꿈을 ‘당구 명인’이라고 표현하다니. 철이 없는 것인지, 자유분방하고 당당한 것인지 한참 동안 그 그림을 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을 이렇게 생생하게 그린 것을 보니 혹 당구장 주인을 꿈꾸는 건 아닌지. 사람들의 수군거림처럼, 내가 그 아이의 부모라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전시장을 나오면서 그 아이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워졌다. 나의 생각, 우리의 직업관이 지독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2015년 대한민국 중학교 2학년이 당구 명인이나 당구장 주인을 꿈꾸면 안 된다는 말인가.

내년도 대입 수시모집이 최근 끝났다. 일부 대학은 예외지만, 수험생들은 대부분 지원 대학에 자기소개서와 추천서를 제출한다. 자기소개서는 학생 스스로 쓰고, 추천서는 교사가 작성한다. 그러나 수험생이 100% 스스로 자기소개서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그 내용도 전략적으로 과장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됐다.

추천서에도 문제가 많다. 교사가 학생들의 추천서를 쓰려면 한두 건이 아니다. 학생 한 명만 해도 여러 건이다. 여러 대학, 여러 전공에 지망하다 보니 여러 건의 추천서를 써줄 수밖에 없다. 동일한 학생의 추천서라고 해도 대학에 따라, 전공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해야 한다. 추천서1에는 고등학교 내내 이쪽 전공에 관심을 갖고 몰입했다고 써놓고는 추천서2에는 이와 전혀 다른 저쪽 전공에 몰입했다고 쓰는 식이다. 심지어 학부모로부터 추천서를 받아오라고 하는 학교도 있다고 한다. 학부모가 써준 추천서를 참고만 하는지, 그대로 활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비교육적인 행위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이렇게 쓰인 추천서를 토대로 누구를 뽑고 누구를 떨어뜨린다.

자기소개서와 추천서에 익숙한 시선으로 보면 ‘당구 명인’ 아이의 꿈은 걱정스러울지 모른다. 하지만 자기소개서와 추천서의 시각에서 벗어나면 사정이 달라진다. ‘당구 명인’은 우리 아이들의 솔직하고 당당한 꿈이기 때문이다.

이광표 정책사회부장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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