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 무릎 꿇은 대형로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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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년 10월 7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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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1007호/집중 기획]
갈수록 치열해지는 입찰 경쟁…로펌들 ‘울며 겨자 먹기’식 덤핑 수주

개인 변호사 사무실과 달리 대형로펌의 주고객은 대기업이다. 기업 내 사소한 소송은 물론, 계열사 매각 및 인수합병과 관련한 법률자문, 오너 일가의 법적분쟁 등 로펌 생산성에 도움이 될 만한 굵직한 송무를 담당할 수 있기 때문. 이러한 이유로 대형로펌들은 대기업과 법률 파트너 관계를 맺고,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과거 10대 로펌에 이름 올린 대형로펌들은 번갈아가며 대기업의 법률자문을 맡아왔다. 그러나 로스쿨 도입 이후 법조인이 쏟아지면서 공급이 급격히 확대되고, 기업들도 대형로펌을 상대로 법률자문 등에 대해 입찰을 진행하면서 최근 경쟁이 매우 치열해졌다. 일정 금액 이상이 아니면 일감을 가져오지 않던 대형로펌이 이제는 저가에라도 수주하기 위해 덤핑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KDB산업은행 예정가 12억 원, 낙찰가 3억 원

8월 말 KDB산업은행(산업은행)이 대우증권 매각을 위한 법률자문사 선정 작업에 들어갔을 때도 대형로펌들의 경쟁은 치열하게 전개됐다. 당시 산업은행은 예정가 12억 원에 입찰참가자격 사전심사(pre qualification·사전에 입찰자격 심사를 거쳐 통과한 로펌에 대해서만 본입찰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방식)를 진행했는데, 이를 통과한 로펌은 6개였고 이후 본입찰을 뚫고 최종 선정된 곳은 법무법인 광장이었다. 로펌 관계자 사이에서 화제가 된 것은 광장이 최종적으로 써낸 금액이 3억 원대였다는 점이다.

당시 각 로펌은 본입찰에 앞서 입찰액을 두고 회의를 진행했다. A로펌 관계자에 따르면 “내부 회의에서 ‘8억 원 이하를 쓰면 인건비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지만 일각에서 ‘8억 원으로는 어려울 것’이란 지적이 나와 결국 7억 원대에 입찰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예상치 못한 가격에 법률자문사가 결정되자 입찰에 참여했던 로펌 대부분이 허탈해했다는 후문이다. 이 관계자는 “이번 건은 은행업계와 로펌사 사이에서 화제가 됐을 정도로 상당히 파격적인 금액이었다. 이 경우 추측건대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쪽으로 수익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면 딱 그 가격만큼만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광장 측 관계자는 “자문계약 금액에 관해서는 산업은행과 광장 모두 함구령이 내려져 답변할 수 없다”면서 최근 로펌들이 대기업의 자문계약 입찰 시 경쟁적으로 낮은 가격을 써내는 분위기에 대해 “해당 건만 생각하고 입찰을 진행하는 것은 아니다. 차후 여러 계약까지 생각하고 들어가기 때문에 해당 건만 놓고 금액이 적다 많다를 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번 입찰에서 또 하나 관심을 끈 것은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불참이었다. A로펌 관계자는 “김앤장이 과거 한 프로젝트를 덤핑으로 낙찰받았다 인건비도 건지지 못해 담당자가 크게 혼난 적이 있어 이번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김앤장 측 관계자는 “관련자들이 산업은행 건은 회사 이익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거나, 매수자 쪽 일을 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최근 대기업의 법률자문사 선정 입찰 과정에서 대형로펌들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최근 대기업의 법률자문사 선정 입찰 과정에서 대형로펌들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그러나 업계 1위인 김앤장도 이러한 입찰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례로 현대자동차그룹(현대차)이 2014년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전력공사(한전) 부지를 매입한 이후 이 땅에 대한 개발 계획과 관련한 법률자문사 입찰에서 김앤장이 낙찰되는 과정에 웃지 못할 일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B로펌 관계자는 “지난해에도 김앤장은 삼성동 한전 부지 개발 계획과 관련한 현대차의 법률자문사 입찰에서 통상적인 수준인 30억 원에 참여했다. 그런데 현대차 측에서 ‘다른 로펌 가운데 3억 원을 써낸 곳도 있다’며 ‘차이가 너무 난다’고 하자 결국 10억 원대로 낮춰 써내 낙찰받았다”며 업계 소문을 전했다.

김앤장은 2003년 김영무 대표변호사의 장녀 선희 씨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손자인 문선 씨와 결혼으로 범(汎)현대가와 사돈관계를 맺으면서 2005년 현대차 미국 앨라배마 공장 설립, 2010년 현대차의 현대건설 인수 등 현대차와 관련한 법률자문을 상당수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현대차 관계자는 “개인이든 기업이든 소송에서는 이기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 측면에서 업계 1위인 김앤장을 선임한 것이지 혼맥 때문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중소로펌들도 기업 자문에 뛰어들어


산업은행의 이번 법률자문사 낙찰금액은 업계에서 ‘파괴적’이라고까지 평가되고 있다. B로펌 관계자는 “통상 로펌에서 대기업 자문료를 최고가의 20% 정도는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라 보고 할인해주기도 한다. 별도의 프로젝트가 예상되거나, 자문 과정에서 기간이 길어진다거나, 관련 부속 업무가 늘어나는 경우까지 생각한다면 40%까지 할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건과 같이 70% 할인은 말이 안 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현상은 최근 몇 년 사이 대기업 법률자문 입찰에 중소로펌까지 뛰어들면서 심화하는 양상이다. C로펌 관계자는 한 대기업의 법률자문 입찰 과정에서 “거부할 수 없는 요청을 받고 제안을 수락한 일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이 보통 법률자문사를 선정할 때 기술평가와 가격평가를 각각 진행한 뒤 종합점수를 매겨 최종 선정한다. 자사 로펌이 기술평가에서 1등을 했는데 가격평가에서 낮은 점수가 나왔다. 그러자 해당 기업이 비용이 부담된다는 이유로 가격평가에서 상위를 차지한 중소로펌의 가격에 맞춰달라고 요청해와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나마 이런 경우는 양반이다. C로펌 관계자는 “한 로펌이 기업에 법률자문과 관련한 제안서를 제출했는데 해당 기업에서 제안서만 검토한 뒤 입찰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해당 제안서 내용 그대로 다른 중소로펌에 더 싼값에 맡겨버린 경우도 있었다. 사실 입찰 제안서는 해당 로펌의 전략과 법률 노하우가 집약된 고유 기술인데, 그 내용 그대로 다른 로펌에 맡겨버리면 정말 허탈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로펌은 “향후 해당 기업과 관계를 생각해 항의하지도 못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과거 대형로펌의 성역이던 대기업 법률자문에 중소로펌이 뛰어든 데는 법률자문을 통해 인지도를 높이고 향후 중요 법률소송에도 진입하기 위한 전략이 깔려 있다. 그러다 보니 중소로펌들 가운데 일단 기업 법률자문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가격 경쟁력을 높인 곳이 많다. 당초 기업들은 법률자문을 포함한 각종 송무를 담당할 로펌 선정에서 아무리 가격 경쟁력이 높아도 법률서비스의 질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중소로펌 대신 상위 5위권 로펌을 선호했으나, 몇 해 전부터는 이러한 선호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9월 말 ‘동아일보’에서 진행한 2011년부터 5년간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서울행정법원에 접수된 5대 그룹의 민사, 행정소송 분석 결과에 따르면, 삼성의 경우 굵직한 소송은 업계 6위인 법무법인 율촌에, 내부 직원과 근로관계 소송은 업계 8위인 법무법인 지평에 주로 맡겼고, 이 밖에 업계 10위인 법무법인 대륙아주와도 계약을 맺어온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2011년 이후 업계 1위 김앤장과는 단 한 건의 민사, 행정소송도 수임계약을 맺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분쟁 성격에 맞는 로펌을 선택적으로 취하는 삼성의 맞춤형 전략 때문인 것으로 평가된다.
대기업은 대형로펌의 주고객이다. 그러나 최근 대기업들이 자체적으로 법무팀을 강화하면서 로펌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사진은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왼쪽)과 양재동 현대자동차 사옥.
대기업은 대형로펌의 주고객이다. 그러나 최근 대기업들이 자체적으로 법무팀을 강화하면서 로펌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사진은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왼쪽)과 양재동 현대자동차 사옥.


로펌 대신 기업 법무팀 활용 늘어


기업의 이러한 변화 때문에 로펌도 전략적 자세를 취하는 실정이다. B로펌 관계자는 “로펌은 각각의 전문, 강점 분야가 있다. 이런 분야는 수임료를 비싸게 받고 좀 약하다고 평가되는 비전문 분야에 대해서는 수임료를 싸게 받는 식으로 기업과 계약한다”고 업계 분위기를 전했다. 그런데 일부 대형로펌이 비윤리적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고. 그는 “한 대형로펌은 기업 법률서비스 입찰에 들어갈 때 전문 분야에서 유력한 경쟁자와 맞붙을 경우 가격을 매우 낮게 쓰는 전략을 취한다. 이는 경쟁사를 차단하기 위해 진입장벽을 치는 덤핑 행위다. 시장경쟁체제에서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겠으나 이는 경쟁 로펌의 의지를 꺾어버리는 처사”라고 비난했다.

로펌의 기업 대상 법률서비스 단가가 일부 낮아지는 데는 변호사 공급의 증가도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강신업 대한변호사협회 공보이사 겸 변호사는 “일단 로펌이 기업 송무를 담당하려면 10대 로펌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어야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정부나 공공기관 사건은 로펌 순위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로스쿨 졸업생이 배출된 2012년부터 로펌들은 몸집 불리기 차원에서 변호사를 많이 뽑았다. 그러나 늘어난 공급에 비해 수요는 그대로인 실정이다. 이 때문에 서로 기업 자문을 수주하려다 보니 전반적으로 단가가 낮아지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기업 사내변호사가 급격히 증가한 것도 또 다른 원인으로 꼽힌다. 8월 말 서울지방변호사회에 등록된 5대 그룹 변호사 회원 수는 삼성 335명, LG 105명, 현대차 96명, SK 93명, 롯데 35명이다(표1 참조). 삼성의 사내변호사 수는 변호사 수 기준 로펌 순위 2위인 법무법인 태평양(342명)과 3위인 광장(340명) 수준이다(표2 참조). 이 때문에 기업들은 웬만한 법적 분쟁은 외부 로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체 법무팀에서 처리하고 있다. D로펌 관계자는 “변호사 등록을 하지 않은 법무인력까지 합하면 국내 기업들의 사내변호인력 수는 2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향후 로펌의 경쟁 상대는 일반 로펌이 아니라 기업 법무팀이 될 날도 머지않았다”고 전망했다.

경제 불황에 따른 기업의 저성장 현상도 원인으로 지목된다. 강 공보이사는 “몇 년째 우리나라는 저성장이 계속되고 있고 기업들의 자금 사정도 악화된 상황이다. 로펌에서 삼성이나 현대를 잡았다고 해서 든든한 고객을 확보했다고 볼 수 없다. 이러한 대기업이 더 늘어나야 수임 건수도 늘고 경험치도 쌓여 로펌 성장에 도움이 되는데, 국내 로펌시장은 몇몇 대기업에 편중된 실정”이라고 말했다. 수익에 도움이 될 기업이 적다 보니 로펌들은 고객 관리 차원에서 단가를 낮추고, 기업은 불황과 겹쳐 송무 비용을 낮추는 일이 반복되면서 대형로펌들까지 위기를 맞고 있다.

일각에서는 우리나라 기업의 법률서비스에 대한 인식이 성숙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D로펌 관계자는 “우리나라 기업은 법률서비스의 실제 가치를 낮게 보는 측면이 있다. 기업들은 톱 매니지먼트 법률서비스의 중요성만 높게 생각하는데, 일례로 기업 총수와 관련한 소송은 각 대형로펌에 비용을 아끼지 않고 제값 혹은 그 이상을 투자한다. 그러나 나머지 일반적인 법적 자문이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법률서비스가 거기서 거기’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 등을 예로 들며 “선진국에서는 법률서비스를 중요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기업에서 로펌을 대상으로 경쟁 입찰을 진행하지 않는다. 가격을 낮추는 과정에서 법률서비스가 질적으로 떨어질 것을 알기 때문”이라며 향후 로펌의 법률서비스가 나빠질 것을 우려했다.

최근 추세에 대해 기업들은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지난달 대우증권 매각 관련 법률자문사를 선정한 것과 관련해 “국가계약법상 계열사 매각을 진행할 때 매각주관사와 법률자문사를 선정하게 돼 있는데 그 과정 또한 투명하게 공개한다. 하지만 자문계약금에 관한 부분은 계약상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인지, 얼마나 낮아졌는지는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최근 로펌들의 덤핑 현상에 대해서도 “산업은행에서 특정 견해를 밝힐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현대차 관계자도 마찬가지로 “다른 대기업 법무실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어서 향후 지속적으로 로펌과 일을 진행해야 하는 처지다. 서비스를 받는 처지에서 로펌들의 자문료나 자문의 질 등에 대해 코멘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법률시장 개방이 가져올 혼란과 변화


로펌 관계자들은 대형로펌들의 덤핑이 계속되면 장기적으로 법률시장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D로펌 관계자는 “대형로펌들이 중소로펌들이 진입하지 못하게 가격장벽을 쳐버리면 중소로펌은 도태하고 결국 일부 대형로펌만 시장을 차지하는 과점체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때가 되면 기업은 대형로펌에 초과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과점체제가 아니더라도 전체 시장이 죽어서 헐값에 저질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식으로 로펌 수준이 떨어지는 부작용이 생길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일부 관계자는 최근 변화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강 공보이사는 “사실 법률시장에서 덤핑 개념은 모호하다. 원래 변호사 수임료에는 상한도, 하한도 없다. 특히 법률자문 업무는 성격이 모호하고 객관적 기준이 없는 데다 덤핑을 규제하는 법적 장치도 없어 제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며 앞으로 대형로펌들의 덤핑은 심화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내년 법률시장 개방으로 외국 로펌이 들어오면 한국 로펌과 합작하는 형태로 정착할 공산이 크다. 이 경우 국내 법률시장에 일대 혼란과 변화가 생길 것으로 보이는데, 대형로펌들이 고객을 뺏기지 않기 위해 법률자문료를 더 내리는 등 각종 전략을 취할 경우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정혜연 기자 grape06@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15.10.07.~10.13|1007호 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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