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값 못 내려 vs 안 내리면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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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년 10월 7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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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1007호/커버스토리 | 내겐 너무 비싼 신약 02]
다국적 제약사와 정부의 힘겨루기…특허권 제한해 건강권·건보 재정 지키는 ‘강제실시’ 조항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은 감염병의 대유행 또는 방사선 비상상황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품목허가를 받지 않았거나 품목신고를 하지 않은 의약품도 제조, 수입하게 할 수 있다. 이미 품목허가를 받았거나 품목신고를 한 의약품도 허가 또는 신고된 내용과 다르게 제조하게 하거나 수입하게 할 수 있다.’

1월 신설해 9월 29일 시행된 개정 약사법 제85조의 2 ‘국가비상 상황 등의 경우 예방·치료 의약품에 관한 특례’ 조항의 내용이다.

이 밖에도 우리나라 법에는 ‘국가 비상사태, 극도의 긴급상황 또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특히 필요한 경우’ 특허권자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는 내용의 특허법 제106조의 2 ‘강제실시’ 조항이 있다. 정부가 공익적·비상업적 목적으로 이를 발동하면 특허권자의 허락 없이도 국내에서 필요 약품의 생산 및 공급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에 근거해 강제실시가 이뤄진 적은 없다. 에이즈(AIDS·후천면역결핍증) 치료제 ‘푸제온’을 개발한 제약사 로슈가 2004년 우리 정부의 약가 인하 요구에 반발해 2009년까지 약 공급을 거부했을 때, 그리고 2009년 신종인플루엔자(신종플루)가 창궐해 치료제 ‘타미플루’ 수급에 비상이 걸렸을 때도 정부는 국내 제약사를 통해 약을 제조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이른바 ‘푸제온 사태’ 때는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까지 나서 ‘헌법이 보장한 국민 건강권에 대한 침해’라며 강제실시를 요구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특허청이 시민단체 등의 관련 청구를 기각하며 밝힌 이유는 ‘강제실시를 할 정도로 공공의 이익을 위해 특히 필요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였다.

강제실시의 위력

의약품 특허는 일반적으로 20년간 인정된다. 제약사들은 이 기간 세계 각국에서 독점적으로 약을 판매함으로써 신약 개발 과정에서 투입한 비용을 회수하고 이익을 남긴다. 문제는 푸제온 사례에서 보듯 제약사가 돈을 버는 과정이 때로 비인도적이고 폭력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세계무역기구(WTO) 협정 부속서로 1995년 발효된 ‘무역 관련 지적재산권에 관한 협정(Agreement on Trade-Related Aspects of Intellectual Property Rights·TRIPs)에는 강제실시에 대한 규정이 있다. 개별 국가도 자체 법령에 우리 특허법과 같은 조문을 마련해둔 경우가 많다.

2001년 8월 브라질 정부는 이를 근거로 로슈사의 에이즈 치료제 ‘비라셉트’ 특허를 강제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에이즈 확산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브라질 정부는 비라셉트를 사들여 국민에게 무상공급했다. 그 과정에서 재정 부담이 커지자 로슈사 측에 약값 인하를 요구했으나 거부당한 것이다. 브라질 정부는 이에 특허권자의 시장독점권을 폐지하고 자국 의약기술연구소에 생산 권한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로슈사가 약값 40% 인하에 동의함으로써 이 조치는 철회됐다.

2009년 인권위가 우리 정부에 푸제온 특허에 대한 강제실시를 요구하며 낸 자료에 따르면 태국 정부도 수차례 강제실시 카드를 써서 다국적 제약사와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했다. 2006년 말 에이즈 치료제 ‘칼레트라’(애보트사), ‘에파비렌즈’(머크사)와 혈전 치료제 ‘플라빅스’(사노피-아벤티스사)에 대해 강제실시를 선언한 것이 그 사례다. 당시 미국에 본사를 둔 제약사 애보트는 태국에서 판매 중인 자사 약품을 모두 철수하겠다며 맞섰으나, 태국 정부가 끝내 결정을 바꾸지 않자 이듬해 치료제 가격을 내렸다.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의 특허권자인 노바티스도 2008년 1월 태국 정부의 강제실시 발동 선언 후 저소득자에게 글리벡을 무상공급하기로 결정했다.

선진국 정부 역시 강제실시 조항을 제약사를 ‘길들이는’ 데 활용했다. 미국은 2001년 9·11테러 후 탄저병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자 바이엘사가 특허를 가진 탄저병 치료제 ‘사이프로’에 대한 약가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적정 가격을 놓고 양측의 줄다리기가 이어졌고, 미국 의회와 언론 등은 정부에 강제실시권 발동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 싸움도 바이엘사가 두 손을 들면서 끝났다. 사이프로를 원래 가격의 절반만 받고 미국에 납품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역시 탄저병 공포에 시달리던 캐나다 정부는 자국 제약사에 강제실시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이엘사가 캐나다 정부의 요청이 있으면 48시간 내 사이프로 100만 정을 공급하겠다고 약속한 뒤 이 결정을 취소했다. 이 밖에도 스위스, 인도네시아, 대만, 가나, 기니 등 세계 여러 나라가 강제실시를 통해 다국적 제약사의 약품 특허권을 무력화하거나 약가협상에서 유리한 지위를 확보했다.
1월 20일 페루 건강부 앞에서 한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HIV) 보균자가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제의 독점 생산을 비판하며 ‘건강은 너의 권리다’ 등의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들고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1월 20일 페루 건강부 앞에서 한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HIV) 보균자가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제의 독점 생산을 비판하며 ‘건강은 너의 권리다’ 등의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들고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건강보험 재정을 지켜라”


그러나 강제실시는 통상마찰 등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허용된다는 게 일반적 견해다. 이 때문에 최근 각국 정부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국의 건강보험 재정을 지키기 위한 조치를 모색하고 있다. 의약품의 시판 허가와 건강보험 등재를 구별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존에는 국내에서 판매되는 모든 약품을 건강보험급여 대상으로 삼았으나, 2007년 약의 유효성과 비용효과성 등을 기준으로 의약품을 심사하는 선별등재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최근 세계 많은 나라에서 시행 중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7월 펴낸 ‘신의료기술의 도입과 확산에 관한 정책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해외 각국은 위험분담계약제 등 환자를 보호하고 보험 재정의 안전성도 높이기 위한 다른 수단도 널리 활용하고 있다. 프랑스, 벨기에 등 일부 국가에는 급여 대상 의약품의 처방을 제한하는 제도가 있다. 특정 의약품의 경우 정해진 의료기관 또는 별도의 자격을 가진 의사만 처방할 수 있도록 하는 식이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영국 정부가 운영하는 ‘항암제 기금(Cancer Drug Fund)’도 우리나라가 벤치마킹할 만한 방법이라고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건강보험급여 대상으로 삼기에는 부족하지만 암환자들이 사용하길 원하는 고가 약의 비용을 지원하기 위해 자체 재정으로 기금을 설립, 운영한다. 호주 역시 건강보험급여 대상이 아닌 의약품의 투약 비용을 지원하는 생명보호약품프로그램(Life Saving Drug Program)을 운영 중이다. 브라질,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 등은 정부가 직접 공공제약사를 운영해 고가의 희귀 필수 의약품 등을 생산한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 출신 외과의사이자 과학저술가인 아툴 가완디는 저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부키)에서 건강보험 재정 손실을 줄이고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으로 완화의료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제안했다. 가완디에 따르면 미국 위스콘신 주 라크로스 지역에서는 1991년부터 의료진과 환자들이 삶의 마지막 시기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서로 대화를 나누도록 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 결과 이 지역 주민들이 생의 마지막 6주 동안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과 종말기 의료비용은 전국 평균의 절반밖에 되지 않으며, 기대수명은 전국 평균에 비해 1년 길다고 한다.

양봉민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다국적 제약사의 영향력이 날로 커지는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정부가 중심을 잡고 전문적 리더십을 발휘해 국민의 건강권과 보험 재정을 보호하는 것”이라며 “필요할 때는 강제실시를 검토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희귀질환치료제 지원 기금을 만드는 등 적극적인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15.10.07.~10.13|1007호 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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