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17세 소녀’ 접속하자… 10분만에 ‘조건 만남’ 쪽지 73통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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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성매매 온상 ‘랜덤 채팅 앱’]랜덤 채팅 애플리케이션 사용 실태 들여다보니

《 한 랜덤 채팅 애플리케이션(응용프로그램·앱)에 접속한 지 10분 만에 무려 73통의 쪽지가 날아왔다. 실제 10분은 매우 길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면 다시 ‘딩동’ 하는 알림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가 쪽지를 보냈다는 알림이었다. 받은 쪽지를 모아놓은 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보낸 ‘조건 만남 가능?’ ‘3시간에 ○○만 원’ 같은 제안이 넘쳐났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노골적인 요구도 여럿 눈에 띄었다. 》

○ ‘노골적 요구’ 가득한 랜덤 채팅 앱

동아일보 취재팀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지난달 29일 오후 5시경 한 랜덤 채팅 앱에 접속해 사용 실태를 확인해 봤다. 랜덤 채팅 앱이란 스마트폰으로 신원을 알 수 없는 익명의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말한다.

사용 방법은 간단했다. 앱 장터에서 관련 앱을 검색해 내려받아 스마트폰에 설치한 뒤 앱에 접속해 몇 가지 정보만 입력하면 되는 식이었다. 개인정보를 정확히 입력해야만 가입을 허용하는 일반적인 소개팅, 맞선 앱과는 달랐다.

취재팀은 ‘17세 여성’으로 가장했다. 그러자 쉴 새 없이 쪽지가 날아들었다. 화면에는 쪽지를 보낸 사람이 적어 넣은 대화명과 나이 외에 다른 정보는 노출되지 않았다. 쪽지를 보낸 이들 대부분은 30, 40대 남성. 이들은 ‘지금 볼 수 있나요? 필요한 돈 맞춰 줄게요’ ‘차에서 손으로는 안 될까요?’처럼 성매매를 암시하는 제안을 거리낌 없이 했다.

그중 ‘배트맨’이라는 대화명을 쓰는 이와 일대일 대화를 나눴다. 이 앱은 쪽지를 보낸 사람 중 한 명과 ‘카카오톡’처럼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 취재팀이 미성년자라고 밝히자 그는 ‘조건(만남)은 힘들고 알바는 어때요?’라고 하더니 이내 ‘안전하게 장기로 만나지요. 용돈도 주고요’라고 제안했다. 원조교제를 하자는 얘기였다. 취재팀이 바로 답변을 하지 않자 ‘오늘밖에 시간이 안 된다’며 결정을 재촉했다.

이 모든 대화는 앱을 설치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그 와중에도 쪽지는 계속 날아들었다. 근처에 있다며 ‘바로 데리러 갈 테니 정확한 위치를 알려 달라’거나 ‘몸에는 손을 대지 않을 것’이라며 변태 성행위를 하자고 조르는 30대 남성의 쪽지도 있었다.

○ 랜덤 채팅 앱이 성범죄 연결고리로

이처럼 스마트폰에서 사용할 수 있는 랜덤 채팅 앱은 현재 수백 개에 이른다. 앱을 제작하는 데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지 않고 프로그램 소스도 거래될 정도이다 보니 정확한 앱의 수나 사용자 수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가장 널리 알려진 A앱의 다운로드 수는 500만 건을 넘는다. 이 밖에도 이름이 알려진 앱은 보통 100만 건 이상의 다운로드를 기록하고 있다.

랜덤 채팅 앱을 쓰는 청소년도 적지 않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1월 발표한 ‘스마트시대 대중매체를 통한 청소년의 성 상품화 대응 방안 연구’를 보면 전국 중고교생 4189명 중 14.2%(962명)가 스마트폰에서 주로 이용하는 프로그램으로 ‘랜덤 채팅’을 꼽았다.

심층 면접을 한 청소년 30명 중에는 24명이 랜덤 채팅을 이용한 경험이 있고 이 중 6명은 낯선 이로부터 조건만남 요구를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3명은 실제로 상대방을 만났다고 답했다. 또 22명은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 중 조건만남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여성가족부가 발간하는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자 동향 분석’ 보고서를 보면 2007년 전체 성매매 건수의 7.6%에 불과했던 조건만남은 2012년 51.4%로 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근에는 랜덤 채팅 앱을 활용한 각종 청소년 관련 성범죄도 늘어나는 추세다. 올 1월 경기 양주시에서는 랜덤 채팅 앱으로 여고생 8명을 꾀어내 흉기로 위협해 성폭행한 30대 남성이 검거됐다. 5월에는 랜덤 채팅 앱으로 가출 청소년 4명을 모집한 뒤 하루 2, 3회씩 성매매를 시킨 20대 남성 3명이 붙잡혔다.

경찰청에 따르면 7월 한 달간 집중 단속한 결과 랜덤 채팅 앱을 통한 성매매 건수는 220건, 전체 적발 건수의 22.4%로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두 배가량 증가했다.

○ 현행법으로 처벌은 어려워

이처럼 랜덤 채팅 앱이 청소년을 성범죄로 끌어들이는 창구로 변질되고 있는데도 현행법으로 이를 막기란 쉽지 않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여성가족부는 현재 청소년에게 유해한 앱을 유해매체로 지정하고 있다. 유해매체는 ‘스마트보안관’ 등의 앱으로 필터링이 가능하다.

하지만 랜덤 채팅 앱은 그 프로그램의 주된 성격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는 이유로 유해매체로 지정되지 않고 있다. 방송통신심의위 관계자는 “개인 간 대화를 통해 성매매가 진행되므로 내용을 확인하기 어렵고 심의도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여성부 관계자는 “건전한 의도로 랜덤 채팅 앱을 쓰는 사람도 있는 만큼 유해매체로 지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 십대여성인권센터가 7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랜덤 채팅 앱 26개에서 성매매를 유도하거나 음란 사진을 올리는 등의 유해 정보 39개를 발견해 방송통신위원회에 신고했지만 이 중 22건은 중복 신고를 이유로 ‘각하’되거나 ‘보류’ 처분을 받았다. 나머지 17건도 증거 불충분으로 ‘각하’ 또는 ‘해당 없음’으로 처리됐다.

랜덤 채팅 앱의 수익원은 배너 광고다. 사용자가 많을수록 더 많은 광고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개발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문제로 지적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랜덤 채팅 앱은 대화 기록이 남지 않고 이용자 추적도 불가능하다. 불쾌함을 느낀 사용자가 앱에 딸린 신고란에 글을 남기더라도 앱 운영자가 이를 외부 기관에 전달하는 일은 거의 없다.

경찰 관계자는 “한정된 인력으로 수백 개 앱을 다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성매매가 이뤄진 일부 앱을 폐쇄조치하기도 하지만 개발자들이 앱을 다시 만들면 그만이다 보니 단속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성윤숙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청소년들이 랜덤 채팅 앱처럼 유해한 매체에 너무나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문제”라며 “청소년의 유해매체 접근을 막을 수 있는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민 kimmin@donga.com·박창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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