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리포트]“노동조건 노사 자율로”… 佛 좌파정권, 노동법 단순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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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노동개혁 현장을 가다]<上>개혁 밀어붙이는 佛-英 정권

프랑스에서 국제 화물운송회사 법인 대표로 일하고 있는 한국인 A 씨(49). 프랑스 법인에 발령받은 뒤 현지 직원들이 시도 때도 없이 결근과 조퇴를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3, 4일의 결근은 병원 진단서 없이도 병가로 처리됐다.

A 씨는 어느 날 영업 부서에서 일하는 프랑스 직원 B 씨가 가져 온 병가 신청서를 보고 웃음이 나왔다. 의사가 발급한 진단서엔 ‘이 사람은 몸이 아파 오전 9시∼11시 반, 오후 2시∼4시 반 일할 수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A 씨가 “의사가 왜 오전 11시 반부터 오후 2시까지는 괜찮다고 했느냐”고 묻자 B 씨는 “점심식사는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회사 측에서 이 직원에게 영업팀이 아닌 다른 부서로 옮기라고 해도 노조 간부인 B 씨는 버텼다. A 씨는 “‘업무 태만’에 대한 경고를 주었더니 B 씨가 또다시 병가 신청서를 들고 왔다”고 말했다. 이번엔 의사 소견서에 ‘스트레스로 인한 울화병이 생겼으니 장기간의 요양이 필요하다’고 적혀 있었다. 그는 이후 2개월간 병가를 내고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A 씨는 “정규직 사원을 경영진 마음대로 인사발령을 내거나, 해고할 수 있는 것은 프랑스 노동법상 사실상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고 말했다.

○ 佛, 3000쪽 노동법을 단순하게

이렇듯 프랑스의 경직된 노동법이 경제에 심각한 걸림돌로 등장하자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이끄는 좌파 정부가 노동개혁의 칼을 빼들었다. 올랑드 대통령은 지난달 초 3000쪽에 이르는 두껍고 복잡한 노동법령을 단순화시키는 개정안을 올해 말까지 의회에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노동법 개정의 핵심은 노사가 단체협상을 통해 임금과 노동조건을 바꿀 수 있도록 하는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경제장관은 지난 15년간 사회당의 ‘신성불가침’ 노동정책으로 여겨온 ‘주(週) 35시간 근무제’에 대해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지난달 경제인 모임에서 “오래전 좌파는 ‘적게 일하면 더 잘 살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는 착각이었다”며 “(주 35시간 근무제를 폐지해) 기업들이 자유롭게 피고용인의 근무시간과 계약조건을 정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주 35시간 근무제’란 2000년 좌우 동거 정부 시절 ‘조금 덜 일하면 모두가 일할 수 있다’는 구호 아래 도입된 제도. 그러나 임금이 삭감되지 않은 채 노동시간만 줄어들자 기업들은 고용을 줄이거나, 아예 생산시설을 해외로 옮겨 프랑스 내 일자리만 줄어드는 역효과만 낳았다. 성역을 깨뜨리려는 마크롱 장관에 대해 사회당 일부에서 반발하고 있지만 여론(폐지 지지 75%)은 그의 편이다.

○ 英, 강력한 카리스마로 정부 주도의 노동개혁

독일 네덜란드 아일랜드 스웨덴 등이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노동개혁을 이뤘다면 영국은 정부 주도의 노동개혁 전통이 강한 나라다.

1970년대의 영국은 강성 노조와 과도한 복지로 인한 생산성 하락으로 1976년에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상황에 몰렸다. ‘철의 여인’으로 불렸던 마거릿 대처 총리는 1976년 이후 집권 11년 반 동안 공공노조와의 전면전을 불사하며 노동관계법을 개정해 ‘영국병’을 치유했다.

5월 총선에서 압승한 영국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도 재정 감축, 복지예산 삭감과 함께 노동개혁을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다. 지난달 14일에는 공공노조의 파업을 제한하는 노동법 개정안이 하원을 통과했다. 이 법안은 1984년 대처 전 총리의 노조개혁법 이후 30년 만에 가장 강경한 조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법안에 따르면 교통, 보건, 교육 등 핵심 공공부문이 파업에 돌입하려면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투표율 50% 이상, 득표율 40% 이상을 얻어야 한다. 또 파업 기간에 기업이 외부 대체인력을 고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 ‘실업하기에 좋은 나라’는 옛말

캐머런 영국 총리는 지난해 4월부터 실업급여 수급조건을 강화하는 개혁을 추진 중이다. 실직 후 2년 이상 된 사람들은 1주일에 30시간의 공공근로를 하거나 매일 구직센터를 찾아야만 실업급여 전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규칙을 한 번 어기면 한 달 치 수당인 230파운드(약 40만 원)가 깎이고, 두 차례 위반할 때는 ‘근로회피자’가 돼 3개월 치 수당이 삭감된다.

28개월 동안 4개월 이상만 일하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어 ‘유럽에서 가장 실업당하기 좋은 나라’로 꼽혀왔던 프랑스도 실업급여 제도 개선에 나서고 있다. 마크롱 프랑스 경제장관은 “실업급여 재원의 적자가 40억 유로가 넘었다”며 “구직자들을 일터로 빨리 돌려보내기 위해 구직활동 심사를 더욱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 스페인, 근로자 해고 쉽게 法 고치자 글로벌 車공장들 앞다퉈 몰려들어 ▼

재정위기 남유럽도 개혁 박차


유럽 재정위기의 근원지였던 남유럽에서도 노동개혁의 성과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재정위기 직격탄을 맞았던 스페인은 과감한 노동개혁으로 일자리를 늘리고 기업들의 투자를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 이탈리아도 마테오 렌치 총리 취임 이후 경직된 노동시장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반면 노동개혁을 거부한 그리스는 국가부도 사태를 맞은 뒤 채권단의 요구에 백기 투항했다.

○ 노동비용 낮추자 자동차 공장이 몰려드는 스페인

요즘 글로벌 자동차 공장들이 스페인으로 몰려들고 있다. 지난해 스페인 자동차 생산량은 240만 대로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제쳤다.

스페인은 또 지난해 1.4%의 경제성장률로 6년 만에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났다. 올해는 3.1% 성장할 것으로 전망됐다. 유럽의 경제규모 ‘빅5’ 국가 중 유일한 3%대 성장이다. 이는 2012년 국가부도 위기에 내몰렸던 상황과 180도 달라진 것이다.

스페인 부활의 원동력은 2011년 말 집권한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가 노사정 합의를 통해 추진한 노동개혁이다. 라호이 총리는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정규직에 대한 과보호부터 깼다. 매출이 줄어든 업체는 노조와 협의하지 않아도 근로자를 해고할 수 있도록 노동법을 개정했다. 또한 경영이 어려운 기업은 노조와 합의 없이 자체적으로 임금과 근로시간을 바꿀 수 있도록 했다. 지난해 스페인의 시간당 인건비는 21.3유로(약 2만8000원)로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평균 29.2유로의 73%에 불과했다. 블룸버그통신은 “‘고통 없이 얻는 것은 없다(no pain no gain)’는 원칙에 충실한 개혁을 했다”고 평가했다.

노동시장 유연성이 늘어나자 기업들이 앞다퉈 투자계획을 내놨다. 글로벌 완성차회사들이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스페인에 투자한 금액은 총 42억 유로에 이른다. 경제가 활력을 되찾자 10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났다. 2013년 초 614만 명이었던 실업자 수는 최근 515만 명으로 떨어졌다.

○ 정규직 130만 명 일자리 생긴 이탈리아

렌치 이탈리아 총리는 좌파이면서도 정규직 평생고용 보장 시스템을 깨는 노동개혁에 나서고 있다. 노조로부터 여러 차례 달걀세례를 받으면서 3월부터 시행한 ‘일자리법’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렌치 정부의 개정 노동법은 회사가 근로자를 ‘경영상의 이유’로 해고할 수 있도록 했다. 법원에서 ‘불법 해고’라는 판결이 나오더라도 보상금을 줄 뿐 다시 일자리로 복귀시켜야 할 의무는 없다.

렌치 총리는 또한 정규직을 고용하는 회사에 대해 다양한 세제 혜택과 인센티브를 제공해 비정규직 계약을 줄여 나가도록 했다. 이를 위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준(準)정규직’을 만들었다. ‘준정규직’은 해고가 어려운 전통적인 정규직 노동계약에 비해 권리가 적지만 기존 비정규직보다는 직업 안정성이 높은 노동계약이다. 노동시장에서 구조개선 효과가 즉각 나타났다. 이탈리아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준정규직 고용은 95만 명에 달했고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사람은 33만 명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캐서린 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경직된 노동법이 청년실업률 악화의 주된 요인”이라며 렌치 총리의 ‘일자리 법안’을 높이 평가했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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