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21세기 사도세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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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도’의 한 장면(왼쪽 사진)과 ‘스터디룸 부스’.
영화 ‘사도’의 한 장면(왼쪽 사진)과 ‘스터디룸 부스’.
추석연휴를 맞아 영화 ‘사도’를 자녀와 함께 본 부모가 ‘자식과 서먹서먹해졌다’는 관람후기를 인터넷에 올렸다. “중2 아들과 함께 봤는데 갈등만 더 깊어졌습니다. 어른의 입장에선 사도세자가 왜 죽었는지를 알지만, 어린 아이들은 ‘아비(영조)가 나쁜 놈이다. 아무리 아들이 공부를 게을리한다고 한들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일 수 있느냐’면서 화를 냅니다”라며 난감함을 토로한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영조가 강조한 공부란 일국의 지도자가 갖춰야 할 통치덕목이자 신하들에게 꿀리지 않기 위한 리더십의 ‘무기’를 일컫는 것이지만, 신세대들은 “영화의 메시지는 딱 하나다. 공부 안 하면 아버지한테 죽는다는 것”이라며 평소 공부만 강요하는 부모의 모습을 영화 속 영조에 포개면서 자신들이 느끼는 억압과 분노를 표출한다.

하지만 여전히 부모세대는 “요즘 아이들이 공부 안 하는 건 둘째 치고 일단 너무너무 무식하다”면서 불만이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다”는 관람후기에 대해 신세대로 보이는 일부 누리꾼이 “스포일러(결정적 내용을 미리 알리는 잘못된 행동)”라며 맹비난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도세자가 죽는다는 역사적 사실도 모른단 말이냐. 그럼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는다’는 것도 영화 ‘암살’의 스포일러냐”면서 자녀세대의 가공할 무식함에 혀를 내두르는 것이다.

공부. 예나 지금이나 부모와 자식 간 갈등을 일으키는 ‘주범’임에는 틀림이 없다. 부모들은 영화 속 영조의 대사처럼 “잘하자. 자식이 잘해야 아비가 산다”면서 자식들에게 공부를 강권한다. “내가 네 나이 때는 단 한순간도 공부를 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는데 너는 이런 좋은 환경에서도 공부를 게을리하느냐”며 사도세자를 쏴붙이는 아버지 영조는 지금 이 땅의 수많은 학부모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난 공부도 싫고 권력도 싫소”라는 사도세자의 마지막 외침은 영혼의 탈출구를 찾지 못하며 공부에 질식해가는 요즘 중고생들의 폭발 직전 내면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이 영화 속 부자의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부모는 자신들도 하지 않은 공부를 자식에게 요구하고, 자녀는 “개념을 알아야 공부를 잘한다는데, 도대체 개념을 알 수가 없다. 개념을 알아야 공부를 잘하는 게 아니라,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개념을 금방 아는 것”이라며 볼멘소리다.

이 영화를 본 신세대들에게 물어보니 무릎을 칠 만큼 공감 가는 대목이 하나 있다고 한다. 바로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세자가 임금 대신 정사를 돌보도록 하는 것)을 명한 뒤 벌어지는 모습이란다. 영조는 세자가 국정을 스스로 결정하면 “나를 무시하냐? 왜 알지도 못하면서 네 멋대로 하니?” 하고 혼쭐을 내면서도, 정작 세자가 “어찌 하오리까” 하고 물어오면 “너는 그것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니?” 하면서 핀잔을 준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늘 아버지에게 혼나기만 하면서 ‘난 혼나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자학하는 신세대 자신들의 모습이 아버지 영조로부터 “넌 존재 자체가 역모”라는 저주 섞인 비난을 듣는 영화 속 사도세자랑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사도세자는 과녁을 향해 겨누던 화살 끝을 돌연 위로 쳐들어 저 멀리 하늘로 쏘아버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 부모가 정해 놓은 인생의 과녁을 향해 맹목적으로 돌진해온 허수아비 인생을 후회하면서 허공으로 날아간 화살이 품은 자유로움을 애타게 부러워하는 사도세자는 어쩌면 자신의 진짜 꿈을 감춘 채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너도나도 밤 10시까지 학원에 붙들려 있는 요즘 자녀들의 불쌍한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요즘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사진 한 장을 보고 나는 배꼽을 잡는 동시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21세기 사도’라는 제목으로 떠도는 이 사진은 가로 110cm, 세로 80cm의 이른바 ‘스터디룸 부스’의 홍보사진이었다. ‘공부 집중력을 높일 수 있다’면서 서울 강남의 일부 학부모들이 공부용 부스를 자녀에게 사주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다룬 언론보도도 얼마 전 있었지만, 이 한 장의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일류대냐 아니면 죽음이냐’면서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살아가는 요즘 수험생들이야말로 기성세대가 만들어낸 입시시스템이라는 ‘뒤주’에 갇힌 채 신음하는 이 시대의 사도세자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신은 부모이신지? 만약 그렇다면 “왕가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원수로 기른다”는 영화 속 영조의 대사처럼 나 스스로가 자식을 원수로 길러내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 되돌아볼 것을 이 영화는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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