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청와대, 새누리당 공천룰에도 결재권 행사할 참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1일 0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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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대표가 잠정 합의한 안심번호 국민공천제에 대해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어제 “역(逆)선택과 민심왜곡을 막을 수 있겠느냐”며 5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다른 고위 관계자도 “절차 면에서 당 내부의 합의 과정 없이 대표가 단독으로 결정했다는 것도 문제이고, 내용상으로도 전화 응답률이 2%도 되지 않기 때문에 대표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새누리당 의원총회 3시간 전에 대통령비서실의 고위 관계자들이 안심번호 국민공천제에 일제히 반대 목소리를 낸 것은 어제 새벽 귀국한 박근혜 대통령의 지침이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총선 공천 룰이 김 대표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을 좌시할 수 없다고 여긴 박 대통령이 ‘친박(친박근혜) 동원령’을 내린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청와대에서 “김 대표가 공천쿠데타를 하려 한다. 자기 마음대로 공천하겠다는 것인가”라는 얘기까지 흘러나왔다. 어제 오후 의원총회장 안팎에선 친박계 의원들의 김 대표 성토가 이어졌다. 일부 의원 입에선 “김 대표가 자기 형제(청와대와 친박계)를 죽이기 위해 오랑캐(새정치민주연합 친노계)와 야합하는 것”이라는 극단적인 말까지 나왔다.

결국 의총은 친박계의 반발 속에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를 수용할지 결론을 내지 못한 채 특별기구를 구성해 이 제도를 포함한 공천방안을 논의키로 하는 선에서 끝났다. 김 대표가 “청와대의 지적은 응답률만 빼고 전부 틀린 말”이라면서 “청와대 관계자가 당 대표를 모욕하면 되겠느냐. 오늘까지만 참겠다”고 한 것은 공천권을 둘러싼 여-여 격돌이 이제 시작에 불과한 것임을 보여준다. 청와대로선 총선 결과에 따라 국정운영에 심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만큼 당내 공천 룰 공방에 팔짱을 끼고 있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2012년 임기 말 레임덕 속에 치러진 19대 총선에서 공천권을 전혀 행사하지 못했지만 2008년엔 ‘친박 학살’ 소리가 나올 만큼 공천권을 휘둘러 당시 박 대통령이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때는 임기 2년차에 탄핵정국과 함께 총선을 맞아 ‘대통령당’인 열린우리당 의원을 대거 원내에 진출시킬 수 있었다.

임기가 2년 이상 남은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뒷받침할 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 “여야 동시 국민참여 경선으로 의원후보를 선출하는 방안을 법제화하겠다”며 상향식 공천을 약속했다. 그랬던 박 대통령이 비서들을 내세워 당내 공천 문제에 감 놔라 대추 놔라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칫 당내 의사결정 시스템을 무력화해 정당 민주정치를 훼손하고, 대통령 손에 공천이 좌우되면 새누리당은 ‘마마보이 정당’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공천을 둘러싼 여당의 자중지란(自中之亂)으로 노동개혁을 비롯한 국정 현안도 뒷전으로 밀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오죽하면 친노 비노 간 권력투쟁 중인 새정치연합이 “대통령은 총선 개입을 중단하라”는 비판까지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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