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의 짧은 소설]<41>응급실에서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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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일곱 살 된 아들을 둘러업고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 무렵이었다.

미열이 있었지만, 저녁식사도 평상시처럼 하고 스스로 양치질도 하기에 가벼운 감기려니 생각했는데, 잠자리에 들 무렵 상황이 돌변했다. 가슴이 아프다고 하더니, 이내 구토를 하고 입술이 퍼렇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곤 축축,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온몸이 아래로, 아래로 처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 아내와 이혼을 한 그로선 처음 겪는 일이었다. 중이염이나 후두염 때문에 몇 번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간 적은 있었지만, 모두 외래진료가 가능한 시간에 있었던 일들이었다. 그는 해열제를 찾다가 대충 점퍼를 챙겨 입고 아이를 업었다. 아이의 몸에선, 마치 물파스를 바른 직후처럼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택시를 타고 응급실에 도착한 그는, 그러나 한참 동안 아이의 증상에 대한 이렇다 할 의료진의 설명을 듣지 못했다. 간호사 한 명만이 그의 아들에게 침대를 배정해주고 체온을 재고 짧게 증상을 물어왔을 뿐이었다. 조금 기다리면 선생님이 오실 거예요. 간호사는 그렇게 말하곤 다시 다른 침대로 달려갔다. 그는 누워 있는 아이의 손을 잡은 채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만큼 응급실엔 환자들이 많았다. 커튼을 친 침대와 그렇지 않은 침대가 있었는데, 둘 다 공평하게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교통사고를 당한 듯한 환자와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는 환자, 이마에 피 묻은 붕대를 감고 있는 환자. 환자들은 제각각 다른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지만, 의사들의 표정은 모두 똑같았다. 젊은 의사들은 119 구급차가 사이렌 소리를 내며 도착하면 우르르, 기계처럼,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뛰어가곤 했다.

한 시간 남짓 지나서야 아까 그 간호사가 링거를 들고 아이의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저기 선생님은? 그가 묻자, 간호사는 조금 지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 오실 거예요. 오늘 따라 응급환자가 워낙 많아서요. 그는 조금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목소리를 낮춰 간호사에게 말했다. 우리 애도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간호사는 아이의 팔에 링거 주사를 놓으며 대답했다. 우선 열을 내리는 게 중요하니까요. 의사 선생님이 오셔도 그것부터 먼저 할 거예요. 그는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으나, 간호사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안내 데스크 쪽으로 바쁘게 뛰어갔다.

응급실은 처음이신가 봐요? 그가 간호사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려 할 때, 바로 옆 침대 보조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가 물었다. 삼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는데, 추리닝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여자가 지키고 앉아 있는 침대엔 초등학교 일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두 눈을 끔뻑거리며 누워 있었다. 소용없어요. 여기선 다섯 시간 기다리는 게 기본이에요. 그는 여자의 말에 맥이 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다섯 시간이라니…. 그동안 아이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다면…. 추리닝을 입은 여자가 그의 아들 침대 근처로 다가왔다. 이 수액 다 맞고, 그래도 열이 안 떨어지면 뇌수막염 검사를 할 거예요. 그때부턴 좀 빨라지니까 너무 걱정 말고요. 여자는 그의 아들의 머리카락을 몇 번 뒤로 쓸어 넘겨주면서 말했다. 의사이신가요?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여자는 콧잔등을 살짝 구기며 말했다. 아이가 자주 아프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게 많아요. 여자의 그 말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또 한편 편안하게 해준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아이 침대 옆 보조의자에 앉았다. 그러곤 가만히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주위 침대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엄마…. 그의 귀에 옆 침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여자아이 침대를 등진 채 앉아 있었다. 왜? 여자아이의 엄마가 대답했다. 앞으론 소용없다는 말은 하지 마. 여자아이의 말은 무표정했고, 또 침착했다. 왜? 그게 사실이잖아. 다섯 시간 기다리고 그러는 거…. 여자아이의 엄마가 말했다. 그래도 하지 마. 아저씨는 몰라도…. 아이가 다 듣잖아. 그러면 더 아파. 더 힘 빠진다고…. 애들도 다 안다고…. 그는 하마터면 고개를 돌려 여자아이를 바라볼 뻔했다. 하지만 그는 간신히 그 마음을 참아낼 수 있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아이 손을 기도하듯 꼭 잡고, 뒤에 누워 있는 여자아이의 건강을, 여자아이 엄마의 마음을 위해, 기도했다. 그의 귓가엔 계속,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기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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