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그렇구나]루벤스에서 힌트 얻은 ‘호가든’… 피카소가 사랑한 ‘바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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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예술
맥주를 든 아담과 이브… 선악과 같은 치명적 매력… 호가든 병 라벨에 활용
맥주 라벨 붉은 삼각형서 영감 얻은 피카소… 맥주 등장 작품 40여점
‘낮술 한잔을 권하다’ 박상천 시인, 금기를 깬 자아 그려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1597년 그린 바로크 스타일의 유화 ‘아담과 이브’(오른쪽). 호가든 ‘금단의 열매’ 병 라벨에는 이 작품을 패러디한 그림이 들어가 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1597년 그린 바로크 스타일의 유화 ‘아담과 이브’(오른쪽). 호가든 ‘금단의 열매’ 병 라벨에는 이 작품을 패러디한 그림이 들어가 있다.
벨기에 맥주인 호가든(후하르던) ‘금단의 열매’ 병 라벨에는 벌거벗은 남녀가 서 있다. 남자는 맥주가 반쯤 담겨 있는 맥주잔을 왼손에 들고 슬며시 여자에게 내밀며 권하고 있고, 여자는 눈을 내리깐 채 요염한 포즈로 맥주잔에 담긴 술의 향기를 맡고 있다. 남녀는 주요 부위만 잎사귀로 가리고 있고, 이들을 감싸고 있는 자연은 태곳적 이미지를 풍긴다. 맥주가 선악과보다 더 강한 유혹으로 인류의 오감을 자극하고 있는 모양새다.

주신(酒神) 디오니소스가 인류에게 술을 전해준 이래 술은 문학과 예술의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예술뿐 아니라 술병의 라벨에서도 영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술병에 붙어있는 라벨은 술의 얼굴이다. 사람의 얼굴에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녹아있듯 술병의 라벨에는 제품의 역사와 특징이 녹아있다.

술병 라벨에 이런 뜻이

호가든이 맥주병에 넣은 명화의 원작은 16세기 바로크 미술의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1597년 작 ‘아담과 이브’다. 거장의 그림에 상상력을 발휘해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맥주로 이브를 유혹하는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선악과라는 ‘금단의 열매’를 맥주로 치환해 이를 마시는 사람에게 묘한 긴장감을 전달하기 위해 이런 그림을 넣었다. 한 모금만 마셔도 안락하고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수 있을 정도로 치명적 매력을 가진 맥주라는 것을 보여준다.

벨기에의 레페 맥주. 맥주잔 문양에 수도원의 탑 모양이 형상화돼 있다.
벨기에의 레페 맥주. 맥주잔 문양에 수도원의 탑 모양이 형상화돼 있다.
맥주 라벨의 모양 자체가 종교적 의미를 내포한 경우도 있다. 벨기에의 맥주 레페는 1204년 벨기에의 노트르담 드 레페 수도원에서 탄생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레페의 라벨에는 수도원 내 성당 탑의 스테인드글라스 문양을 본뜬 황금색 문양이 들어가 있다.

멕시코 코로나 맥주의 상징인 왕관은 토착 종교와 결합된 가톨릭 신앙의 모습을 담고 있다. 16세기 스페인 군대가 장악한 멕시코 지역에서는 전통적으로 태양신을 숭배하고 있었다. 스페인인들이 원주민들에게 가톨릭교를 전파했지만 이들은 형식적으로 받아들였을 뿐 여전히 자신들의 토착신앙을 믿고 있었다. 이때 멕시코 과달루페 마을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난다. 성모 마리아의 얼굴은 갈색 피부를 가진 전형적인 원주민의 형상. 스페인으로 상징되는 구대륙의 흰 피부를 가진 성모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성모 발현 7년 후 원주민을 비롯한 멕시코인 대부분이 토착신을 버리고 가톨릭 신자가 됐다. 이후 과달루페 성모 마리아는 멕시코인들의 신앙 속에 깊게 자리 잡으며 수호성인이 됐고, 이에 따라 마리아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는 그림이나 동상이 생겨났다.

세계적인 입체파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가 1914년 완성한 정물화 ‘바스병과 잔’(왼쪽). 이 그림에는 오른쪽의 바스병이 추상적으로 표현돼 있다.
세계적인 입체파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가 1914년 완성한 정물화 ‘바스병과 잔’(왼쪽). 이 그림에는 오른쪽의 바스병이 추상적으로 표현돼 있다.
맥주병 라벨에 붙은 문양이 오히려 화가에게 무한한 영감을 준 경우도 있다. 영국의 에일 맥주인 바스의 붉은 삼각형은 입체파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피카소는 ‘바이올린과 바스 맥주’, ‘바스병과 잔’, ‘바스병과 잔 그리고 담뱃갑’ 등 맥주가 등장하는 작품을 40점 이상 남겼다.

술과 문학

술병의 라벨은 알고 보면 뜻깊은 인문학적 역사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술병에 들어있는 내용물인 술은 문학에서 어떤 의미로 나타날까.

술은 문학을 통해 개개인의 삶에 자유의 날개를 달아준다. 박상천 시인의 시 ‘낮술 한잔을 권하다’에서 술은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결정하는 실존주의적 삶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낮술은 삶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모든 금기 및 억압과 반대되는 상징이다. 박 시인은 “삶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했다”며 “선택의 갈림길에서 사회적 관습인 ‘금기’를 지키기보다 깨뜨림으로써 도전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술은 시대 상황을 나타내는 표상이 되기도 한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는 술, 그중에서 유독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의 처녀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부터 주인공은 계속 맥주를 마셔댄다. 이에 대해 허희 문학평론가는 맥주를 혼란의 시대에서 무라카미가 발견한 개인성의 상징으로 본다. 허 평론가는 “무라카미는 일본 대학의 폭력적이고 과격한 학생운동을 목격한 세대다. 그는 학생운동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거대 이데올로기가 인간 개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숙고하기 시작했고 이념에서 벗어난 개인성의 상징으로 맥주를 작품에 사용했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문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애주가였던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시집 ‘악의 꽃’에서 술과 관련된 여러 편의 시로 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노래했다. ‘고독한 자의 술’이란 시에서는 희망과 젊음 그리고 생명을 불어넣는 존재로, ‘술의 넋’에서는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로 술을 표현했다.

백연상 기자 bae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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