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뉴욕의 그늘’로 걸어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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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심장’ 뒤흔든 교황]
수만명 뉴요커에 깊은 울림 준 ‘낮은 행보’

《 미국에 간 프란치스코 교황이 워싱턴에 이은 두 번째 방문 도시 뉴욕에 도착해 맨해튼 성 패트릭 대성당에서 저녁미사를 집전하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교황의 뉴욕 도착은 미국 최대 도시이자 ‘세계 금융과 자본주의의 상징’인 도시의 모습처럼 화려했다. 교황은 24일(현지 시간) 오후 5시경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한 뒤 곧바로 헬기를 타고 맨해튼 남쪽 월스트리트 헬기장에 내렸다. 여기서부터 50번가와 51번가 사이에 있는 성 패트릭 성당까지 카퍼레이드가 펼쳐진 ‘5번가’는 백화점과 명품 가게가 즐비한 맨해튼에서 가장 화려한 쇼핑 거리이다. 교황 도착 10시간 전인 이날 오전부터 도로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수만 명의 뉴욕 시민들은 교황이 탄 차량인 ‘포프모빌’이 지나가자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를 연호했다. 너도나도 휴대전화로 교황의 모습을 찍기에 바빴다. ‘할리우드 스타’나 ‘스포츠 영웅’ 이상의 환영이었다. 교황의 ‘뉴욕스러움’은 거기까지였다. 교황은 곧 이어진 미사를 집전하며 ‘진정한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물었고, 이튿날인 25일엔 맨해튼의 가장 ‘낮은 곳’이라 할 수 있는 빈민가(할렘)를 찾았다. 또 9·11테러 희생자 유가족을 끌어안고 함께 슬픔을 나눴으며 이민자와 노숙인들까지 보듬는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

▼ 성 패트릭 대성당 미사… 정치인들 앞에서 “세속적 성공에 갇히지 말라” ▼


교황은 24일 오후 7시경 성 패트릭 대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성당 안에는 이미 오후 3시경부터 이중삼중의 신분 확인 절차와 보안검색을 끝내고 입장해 있던 2500명의 성직자와 신도가 성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교황을 기다렸다.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 빌 더블라지오 뉴욕 시장, 찰스 슈머 연방 상원의원(뉴욕) 등 뉴욕을 대표하는 정계 인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교황의 첫 번째 메시지는 뉴욕 도착 바로 몇 시간 전인 이날 사우디아라비아 이슬람 성지 순례에서 압사 사고로 숨진 700여 명의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였다. 이날 강론의 요지는 가톨릭 성직자들을 향해 “세속적 성공에 대한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경고였다. 자기 성찰의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교황은 ‘진정한 성공의 기준’과 관련해 “(예수님이 못 박혀 숨진) 십자가를 보라”고 했다.

“우리(성직자)는 씨앗을 심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우리 노력의 결실은 하느님이 판단하시는 겁니다. 노력과 활동이 실패했거나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도들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속적으로만 보면 예수님의 삶도 실패로 끝난 겁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니까요.”

뉴욕타임스(NYT) 등은 교황의 강론이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효율성과 물질적 안락만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 세상 사람들에게 ‘겸허하게 살아갈 것(live humbly)’을 주문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 유엔총회 연설… “환경보호가 불평등-소외 극복의 길” 기후협약 강조 ▼

25일 오전 유엔을 방문한 교황은 특별연설을 통해 “지구 환경을 보호하고 더불어 사는 것이야말로 불평등과 소외를 극복해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어 “사람도 (지구)환경의 일부이며, (지구 안의)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섭리”라며 “환경을 해치는 행동은 무엇이든 결국 인간성(humanity) 훼손이 된다. 또 무참한 사회적 소외로 이어지게 된다”고 경고했다. 교황은 “12월 프랑스 파리의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 신기후체제가 수립되는 것이 (지구 보호를 위한)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합의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당부했다.

교황은 193개국 대표들을 향해 “정부 지도자는 국민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받으며, 가족을 부양하며,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최소의 수단인 ‘잠자리(lodging), 노동(labor), 땅(land)과 영적인 자유’를 확보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적인 자유에는 종교적 자유와 교육 받을 권리 등이 포함된다고 했다.

교황은 또 “전쟁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권리와 환경을 부인하고 말살하는 행위”라며 “특히 모든 인류를 파괴할 수 있는 핵무기 같은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은 (인류의) 자기모순이고 (국제평화를 위해 설립된) 유엔에 대한 모욕”이라고 지적했다. 핵확산금지조약(NPT)이 제대로 지켜지면서 ‘핵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유엔 자체가 ‘공포(fear)와 불신(distrust)에 의한 국제연합’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965년 10월 4일의 바오로 6세 △1979년 10월 2일과 1995년 10월 5일의 요한 바오로 2세 △2008년 4월 19일의 베네딕토 16세에 이어 유엔을 방문해 연설한 네 번째 교황이다.  
▼ 할렘 빈민가-노숙인 쉼터 방문… “예수님도 세상 올때 노숙인이었다” ▼

교황은 25일 오전 유엔 특별연설을 마치자마자 9·11테러 현장인 그라운드제로를 방문했다.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동판 앞에 멈춰선 교황은 잠시 묵념을 올렸고 현장에 있던 700여 명의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오후엔 맨해튼의 ‘가장 낮은 곳’으로 불리는 북부 할렘 지역의 가톨릭 학교(Our Lady Queen of Angels School)를 방문해 초등학교 3, 4학년 학생 24명과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교황청 관계자는 “가톨릭 학교에서 공부하며 꿈을 키우는 빈민층과 이민자들의 자녀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 특별히 마련된 일정”이라고 설명했다.

교황은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출발하기 전인 24일 오전에도 워싱턴 성 패트릭 성당의 노숙인 쉼터를 방문했다. 교황은 노숙인 등 약 400명이 모인 이 자리에서 “지붕 없는 말구유에서 태어난 하느님 아들(예수님)도 이 세상에 올 때 집 없는 노숙인이었다”고 말했다. 교황은 “세상에는 (여러분이 집이 없는 것처럼) 부당한 상황이 많지만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고통스러워하시고,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고 말했다.

노숙인을 위한 쉼터 마련 등에 적극적인 더블라지오 뉴욕시장은 24일 “교황의 뉴욕 방문을 계기로 교황의 정신을 받들어 노숙인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노력을 더욱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교황 방문(24∼26일)과 유엔개발정상회의(25∼27일)가 겹친 뉴욕은 정상들이 묵는 호텔들과 유엔본부 일대, 교황이 방문하는 장소들에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경호경비가 펼쳐졌다. 24일 저녁 교황이 미사를 집전한 성 패트릭 성당은 건물 전체를 약 2.5m 높이의 철조망으로 둘러싸고 인근 지하철역에선 개찰구를 나오자마자 1차 가방 검색을 실시하기도 했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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