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한 사람의 피로 물든 돈”… 교황, 美총기거래 강력비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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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초로 美의회 연설
“생명은 존엄” 사형제 폐지 권고… 사회 양극화-금권정치 우려 표명
이민자 포용-기후변화 대책 촉구… 美정치 민감한 이슈 정면 거론

역사적인 미국 방문 사흘째를 맞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24일(현지 시간) 오전 연방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을 통해 미국의 총기 규제를 강력히 촉구했다. 또 사형제 폐지 권고와 함께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와 부자만을 위한 정치체제에도 은유적인 경고를 던져 파장이 예상된다. 교황의 미 의회 연설은 사상 처음이다.

교황은 이날 연설에서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때론 완곡하게, 때론 직설적으로 지적했다. CNN은 이런 행보에 대해 “교황이 미국 정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평가했다.

교황은 24일 오전 9시 20분부터 조 바이든 부통령과 존 베이너 하원의장(공화·오하이오) 등 연방 상하원 의원 수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하원 의사당에서 진행된 연설에서 “개인과 사회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려고 계획하는 이들에게 살인적인 무기가 팔리는 이유를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며 “그 이유는 단순히 돈, 특히 무고한 자들의 피로 물든 돈”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수치스럽고 죄스러운 침묵에서 벗어나 무기 거래를 중단시키도록 나서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주장했다.

교황은 ‘전 세계의 무력 충돌’이라는 맥락에서 이야기했지만 총기 사고가 끊이지 않는 미국에 대한 메시지는 분명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2년 재선 직후 총기 규제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지만 전미총기협회(NRA) 등의 강력한 로비를 등에 업은 공화당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내년 대선을 1년여 앞둔 상황에서 교황이 총기 규제를 지지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짐에 따라 이 문제는 양당 대선 후보들의 쟁점으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교황은 또 “미국의 형제 천주교 사제들이 사형제 폐지 청원을 새로 했다고 들었다”며 “정당하고 필요한 처벌이 희망과 재활의 영역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믿는 이들에게 응원을 보낸다”며 미국의 사형제 폐지를 공개적으로 건의했다. 교황은 “모든 생명은 신성하고 인간은 천부적인 존엄을 부여받았으며 유죄 판결을 받은 죄인을 재활시켜 사회도 혜택을 받을 수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교황은 “우리를 두 진영으로 나누는 어떠한 형태의 양극화에도 맞서 나가야 한다”고 공화당과 민주당, 보수와 진보, 부자와 가난한 자의 간극이 커져 가는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호소했다. 특히 “정치는 인간에게 봉사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와 재력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미국 정치의 금권화를 우려했다.

연설 곳곳에서 “취약하고 위험에 빠진 이웃, 가난하고 힘든 노인과 젊은이들”을 유난히 강조해 약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모든 종류의 근본주의에 반대하고 종교와 이념, 경제체제 때문에 발생하는 폭력에 대해서도 경고해 민주 공화 양당 의원들의 박수를 받았다.

교황은 의회 연설을 포함한 거의 모든 공개행사에서 미국이 더 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일 것을 말과 행동으로 호소하며 이민자 유입에 반대하는 도널드 트럼프 등 공화당 대선주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일침을 가했다.

앞서 23일 오전 워싱턴의 세인트 매슈 성당에서 300여 명의 사제가 운집한 가운데 점심 기도회를 집전하던 교황은 “그들(남미의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말아 달라. 이민자들이 이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해 장내를 숙연케 했다. 교황은 백악관에서 열린 공식 환영행사 인사말에서도 “(이탈리아) 이민자 가족의 아들로서,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진 미국에 손님으로 오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운을 뗐다.

교황은 미국의 글로벌 기후변화 대응 노력을 공개적으로 치하해 오바마 대통령에게 정치적 선물을 안겼다. 온실가스 배출 규제 문제 역시 대선을 앞둔 미국 사회에 ‘뜨거운 감자’ 가운데 하나. 환경을 위해 온실가스를 줄이려는 오바마 행정부와 재계의 이익을 대변해 이에 반대하는 공화당 대선 주자들의 견해가 맞서고 있다.

교황은 세인트 매슈 성당에서 미국 천주교 사제단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지적하면서 “죄 없는 낙태 피해자들”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날 공식 일정이 끝난 뒤 교황은 ‘빈민 구호 수녀회’를 방문했다. 1840년 파리에서 창립된 가톨릭 수녀회인 이 단체는 오바마 대통령의 건강보험개혁안(오바마케어)이 낙태에 대한 보험을 허용한 것에 반대해 소송을 냈다. 예정에 없던 방문을 통해 교황은 낙태를 반대한다는 뜻을 완곡히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또 ‘더 나은 내일을 찾다 물에 빠져 죽은 이민자들’을 언급해 전 세계로 퍼져 가는 시리아 난민 문제를 언급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정치화한 교황’이라는 제목의 분석 기사를 통해 “세속적 정치의 전쟁터가 교황의 도덕적 권위를 손상시킬 수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교황의 방미 언행을 바라보는 보수 진영의 불편한 심기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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