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혈흔으로 재구성한 ‘이태원 살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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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구부정한 자세로 소변… 키 작은 패터슨, 흉기공격 가능

발생 18년, 도주 16년 만에 ‘이태원 살인사건’ 피고인 아서 존 패터슨 씨(36·미국)를 국내로 송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경찰의 첨단 과학수사 기법인 혈흔형태분석이 결정적이었다. 검찰은 2011년 경찰의 혈흔형태분석 전문수사관과 공조해 보완수사를 펼쳐 패터슨 씨를 기소했고 전문 수사관의 분석 보고서 등을 미국 법무부에 보내 송환을 성사시켰다.

사건이 일어난 1997년 4월 3일 대학생 조중필 씨(당시 22세)가 흉기에 수차례 찔려 살해된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햄버거 가게 화장실은 출입구부터 온통 피투성이였다. 당시 현장에는 패터슨 씨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증거가 적지 않았다. 서로 상대가 범인이라고 주장하던 에드워드 리 씨(36)보다 패터슨 씨의 몸에 더 많은 피가 묻어 있었고, 피 묻은 칼을 버린 것도 패터슨 씨였다. 하지만 검찰은 리 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피해자(키 176cm)의 오른쪽 목을 찌르려면 그보다 키와 덩치가 더 큰 리 씨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원까지 가는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리 씨는 무죄로 풀려났고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영구 미제가 될 뻔한 이태원 살인사건은 2008년 국내에 도입된 혈흔형태분석 기법 덕분에 극적으로 반전을 맞는다. 당시 혈흔형태분석을 맡았던 이현탁 경위(혈흔형태분석 전문수사관)는 23일 충남 아산시 경찰수사연수원에서 본보 기자와 만나 “혈흔형태분석으로 사건의 실체를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했다.

이 경위가 전하는 당시 현장은 참혹했다. 화장실 벽 1.4m 높이에는 많은 양의 혈액이 한꺼번에 분출된 ‘선상분출혈흔’이 남아 있었다. 동맥, 심장이 파열돼 혈액이 압력에 의해 분출될 때 생기는 혈흔이다. 조 씨가 소변을 보다가 오른쪽 목을 칼로 찔렸고 왼쪽으로 몸을 돌리며 피하다 재차 공격을 받고 많은 양의 피를 쏟아 낸 것이다.

오른쪽 벽면에는 ‘이탈혈흔’이 있었다. 피해자의 목을 찌른 흉기에서 떨어진 피다. 왼쪽 벽면 세면대 주변에도 다량의 혈흔이 있었다. 피해자의 신체 일부가 접촉하면서 생긴 ‘묻힌 혈흔’도 있었다. 조 씨가 여러 차례 공격당하면서 몸부림 친 흔적이다.

이 경위는 혈흔형태분석을 바탕으로 리 씨뿐만 아니라 패터슨 씨도 범인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조 씨가 다리를 벌리고 구부정한 자세로 소변을 보고 있었기에 조 씨보다 작은 사람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 것. 조 씨가 배낭을 메고 있던 사실까지 드러나 뒤에서 배낭을 붙잡고 끌어내리며 찔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사건 발생 직후 리 씨와 패터슨 씨를 만난 목격자는 패터슨 씨는 피로 범벅이 됐고 리 씨는 조금만 묻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소변기 주변의 혈흔 양을 볼 때 가해자가 피를 묻히지 않고 범행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패터슨 씨의 신발에도 피해자의 신체에서 떨어진 핏자국(낙하혈흔)이 선명했다.

사건을 재구성하기 위해 이 경위는 연구실과 시장을 오가며 발품을 팔아야 했다. 당시 1차 수사기록과 필름카메라로 찍은 현장 사진 10여 장을 넘겨받아 일일이 확대해 가며 혈흔을 분석했고, 혈흔의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 화장실 타일 사진을 들고 서울 을지로 일대 상점을 뒤졌다. 고생 끝에 똑같은 타일을 찾았고, 타일 크기를 이용해 핏자국의 위치, 크기도 정확하게 확인했다. 검찰은 이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화장실 모습과 똑같은 형태의 세트장을 만들어 놓고 재연 실험까지 했다.

한편 검찰이 진범으로 지목한 패터슨의 첫 재판은 다음 달 2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변호인이 연기를 신청했다. 검찰은 공소 유지 담당 검사로 2011년 보완 수사를 맡았던 박철완 부산고검 검사를 투입하기로 했다.

:: 혈흔형태분석 ::

사건 현장의 혈흔 위치, 크기, 모양, 방향 등을 분석해 범인과 피해자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사건 현장을 시간 순서대로 재구성하는 과학수사 기법.

아산=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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