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주말 야구여행] 행복을 쏘는 ‘야개맨’ 박석민

  • 스포츠동아
  • 입력 2015년 9월 25일 05시 45분


■ 동작 하나하나에 깨알같은 재미…추석선물세트 같은 남자

곤봉연기에 회오리 타법에
야구 만큼 빛나는 몸개그
가난한 20대에 아빠가 됐지만
“날 만든 건 큰 아들 준현”
매일매일 행복한 야구

추석이면 아이는 행복했다. 엄마가 선물을 한 아름 들고 왔기 때문이다. 선물 꾸러미에는 초코파이도 들어있고, 10여가지의 맛있는 과자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어릴 때부터 식탐이 많았던 개구쟁이 소년은 그래서 늘 추석이 기다려졌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요즘이야 과자가 흔해졌지만, 1980∼199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는 과자종합선물세트가 한가위의 넉넉한 추억이자 아련한 향수로 남아 있다.

1985년생 삼성 박석민(30). 그도 그 세대의 끝자락에서 성장했다. “엄마가 보험회사에 다녔거든요. 추석이면 같은 계열사 제과회사에서 만든 종합선물세트를 가지고 오셨어요. 먹을 것도 많고 푸짐해서 얼마나 좋던지…. 추석이 되면 그 추억이 떠올라요.”

그랬던 그가 이제 ‘그라운드의 종합선물세트’가 됐다. 같은 값을 지불하고도 볼거리가 푸짐하게 펼쳐지기에 ‘박석민 경기’는 팬들에게 늘 인기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놓칠 수 없는 ‘깨알재미’가 있다.

장내아나운서의 호명이 끝나는 순간,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연기가 시작된다. 첫 퍼포먼스는 ‘곤봉 연기’. 배트를 홈플레이트에 한번 툭 친 다음, 리듬체조선수 손연재처럼 왼손으로 방망이를 빙글빙글 돌린다. 그리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연결되는 ‘레그킥 연기’. 타격 직전 구사하는 강정호(피츠버그)와는 달리, 그는 일찌감치 왼다리를 한껏 들어올렸다 내린다. 강아지가 볼일을 보는 듯한 우스꽝스러운 폼이지만, 자신만의 루틴을 행하는 그의 표정은 지나치리만큼 진지해 또 웃음을 자아낸다.

24일 수원 kt위즈파크에서 ‘2015 타이어뱅크 KBO리그’ kt 위즈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가 열렸다. 8회초 2사 1,3루 삼성 박석민이 역전 2타점 2루타를 친 후 타구를 바라보고 있다. 수원|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24일 수원 kt위즈파크에서 ‘2015 타이어뱅크 KBO리그’ kt 위즈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가 열렸다. 8회초 2사 1,3루 삼성 박석민이 역전 2타점 2루타를 친 후 타구를 바라보고 있다. 수원|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이어지는 타격은 예측불허다. 오른발을 뒤로 빼서 홈런을 때리고, 왼발을 뒤로 빼서 홈런을 터트린다. 엉덩이를 뒤로 빼서도 홈런을 빚어낸다. 1경기 9타점 신기록을 작성한 20일 사직 롯데전. 유심히 본 팬들이라면 각기 다른 스텝과 폼으로 ‘홈런 3종 세트’를 그려내는 ‘신기’의 타격기술을 확인했으리라.

그날은 보여주지 못했지만 ‘회오리 타법’도 있다. ‘피겨여왕’ 김연아처럼 우아한 ‘트리플 악셀’ 연기를 펼치는 사이 타구는 하얀 무지개를 그리며 어느새 담장을 넘어간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식 밖의 타격폼. 그는 그동안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할 수도 없는) 그런 독특한 타격폼으로 팬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몸 개그’와 ‘촌철살인’도 늘 화제다. 느닷없이 중절모를 쓰고 그라운드에 나타나는가 하면, 덕아웃에서 경기 도중 사과를 갉아먹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돼 웃음을 주기도 했다. 한국시리즈 우승 후 샴페인을 입에 머금고 감히 감독 얼굴에다 분수처럼 내뿜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상대 1루수(넥센 박병호)의 기습적 태그에 낭심을 맞고 고통스러워하는 표정도 ‘박석민 개그모음’의 한 자락을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라운드에서 몸 개그만 펼친다면, 이처럼 팬들의 사랑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난 야구를 하기 전부터 야구를 잘했다”는 그의 허세 혹은 주장처럼 실제로 야구감각을 타고났다. 올 시즌 초반의 부상과 부진을 극복하고 생애 처음 100타점(113개)을 넘어섰다. 3할대 타율(0.321)에 홈런도 26개를 기록 중이다. 사상 최초 정규시즌-한국시리즈 통합 5연패를 노리는 삼성의 캡틴. 사람 사는 세상에서 누구에게도 미움 받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지만, 적어도 야구계에서 박석민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팀에선 선배들에게 사랑받고, 후배들에게 인정받는다. 독특한 타격폼으로 인해 밉상이 될 수도 있지만, 늘 웃는 얼굴의 그는 상대팀에서도 좋아하는 상남자다.

아픔 없는 사람 없고, 사연 없는 사람 없다. 한손을 놓는 ‘트리플 악셀 타격폼’ 역시 그에게는 말 못할 아픔이다. 2009년 슬라이딩을 하다 다친 왼손 중지 부상의 후유증 탓에 생겨난 버릇이다. 양손으로 방망이를 힘껏 잡을 수 없다. “경기 후 집에 가서 하이라이트를 보다 보면 나도 다른 선수들처럼 폼이 예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내가 볼 때도 투박하거든요. 남들은 내가 치는 이상한 타격 폼을 보고 부러워하지만, 나는 예쁜 타격폼의 선수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에게도 힘든 시기는 있었다. 어릴 때는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고, 20대 초반 군 복무(상무) 시절 아들이 태어나면서 경제적으로 궁핍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구김 없이 자랐고, 남들에게 힘든 티를 내지 않았다. 지금 그는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준 것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야구선수로 만들어준 것은 큰 아들 준현이다”며 책임감을 심어준 아들의 존재에 대해 고마움을 나타내고 있다. ‘매일 행복하진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그를 보면 애니메이션 ‘곰돌이 푸’의 명대사가 떠오른다. 힘든 일이 있어도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것. 그래서 즐겁다는 것. ‘해피 바이러스’는 박석민이 야구 외에도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또 다른 선물이다.

박석민은 “요즘 야구장 가는 길이 행복하다”고 했다. 팬들은 그런 박석민을 보러 야구장 가는 길이 즐겁다. 홈런을 칠 때마다 팬들에게 던져주는 노란 손목 보호대는 ‘그라운드의 종합선물세트’ 박석민이 덤으로 주는 선물이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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