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이유종]캐나다의 예산 다이어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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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종 국제부 기자
이유종 국제부 기자
1993년 11월 취임한 장 크레티앵 캐나다 20대 총리는 곧 위기를 예감했다. 당시 캐나다는 현재 그리스와 매우 닮았다. 국가 채무가 과도했다. 1980년 29%에 불과하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은 1993년 67%에 달했다. 무디스 등 국제신용평가 기관들은 캐나다의 신용등급을 낮추기에 바빴다.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은 주요 7개국(G7) 국가인 캐나다를 “제3세계의 명예회원”이라며 비아냥거렸다. 1970년대 초만 해도 캐나다는 엄격하게 재정 수입과 지출을 맞춰 예산 균형을 꾀했다. 하지만 그런 균형이 슬며시 깨졌다. 복지 등 각종 경직성 지출을 늘리면서 국가 채무가 가파르게 증가한 것이다.

이전 정부들도 채무 증가에 따른 경고음을 들었지만 철저히 외면했다. 예산을 줄이면 다음 총선에서 패할 게 뻔했다. 크레티앵 총리는 자신이 속한 중도 좌파의 자유당이 다음 총선에서 지더라도 경제 정상화가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세금을 늘려 재정 적자를 막기보다는 예산을 줄이는 근본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증세를 통한 예산 증액은 미봉책으로, 건전한 성장을 막는다고 봤다.

크레티앵 총리는 ‘작지만 현명한 정부’를 만들겠다고 국민을 설득했다. 정치적 라이벌인 폴 마틴을 재무장관에 기용했다. 내각은 회의적이었다. 크레티앵 총리는 각료회의에서 “예산 증액을 요구하면 해당 부처 예산의 20%를 줄이겠다”며 경고했다. 그런 다음 실업급여 수급자를 줄였다. 국방과 해외원조 예산도 깎았다. 산업부가 54개의 사업을 제안했으나 11개만 허가를 받았다. 부처별로 5∼65%의 예산이 삭감됐다. 공공 부문의 인력도 14% 줄였다. 정치권의 불가침 영역이던 연금과 복지 정책까지 손을 댔다. 1993년부터 2000년 사이 복지 수혜자가 100만 명 이상 줄었다.

이런 노력으로 캐나다는 1998년 27년 만에 처음으로 균형 예산을 달성했다. 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은 2009년 29%까지 줄었다. 공공 분야에서 체력이 회복되자 경제도 성장세로 돌아섰다. 1997∼2007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3.3%로, G7 국가 중 최고치였다. 건강한 경제 체력은 위기에도 강했다. 2007년 금융위기에 따른 경기 침체도 9개월 만에 탈출했다. 경기 회복 이후 고용도 늘었다.

한국의 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은 올해 38.5%, 내년 40.1%로 전망된다. 외환위기를 겪던 1997년에도 12.3%에 불과했다. 정부는 순채권국이라 재무건전성이 나쁘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채무 증가 속도가 매우 빠르다. 이제 예산 다이어트도 고려할 때다. 크레티앵 총리는 단기 성과에 연연하지 않았다. 미봉책보다는 근본 해결책을 선택했다. 신념이 확고해졌을 때는 국민과 의회를 상대로 노련한 리더십도 보여줬다. 다음 총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숙한 캐나다의 유권자는 그의 진정성을 꿰뚫어봤다. 크레티앵 총리는 1993년 이후 2번의 총선에서 승리했고 10년 동안 총리 자리를 지켰다.

이유종 국제부 기자 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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