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중현]물려줄까, 말까 그것이 문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22일 03시 00분


코멘트
박중현 경제부장
박중현 경제부장
“마오쩌둥(毛澤東)이 기초를 다졌죠. 그가 빈부, 남녀의 차별을 없애 사회를 평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중국 경제가 이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베이징에 갔을 때 만난 중국인 경제학자는 중국 경제 성장의 가장 큰 요인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혁명을 통해 빈부, 귀천의 차이를 없앤 것이 고속성장의 밑바탕이 됐다는 주장이었다. 덩샤오핑(鄧小平) 이름이 나올 거란 예상과 달라서 놀랐다.

한국 현대사를 되짚어보면 납득 가는 부분이 없지 않다. 6·25전쟁을 통해 우리 사회는 극도로 평평해졌다. PC를 껐다 켠 것처럼 사회 전체가 ‘리셋’돼 모두 동일한 출발선에 섰다. “노력하면 잘살 수 있다”는 생각은 상승 욕구를 부추겨 세계적으로 선례를 찾아보기 힘든 고도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기획재정부가 최근 국회에 낸 ‘중장기 조세정책 운용계획’ 때문에 이 문제를 다시 고민하게 됐다. 기재부는 노인층에서 젊은 세대로 부(富)의 이전이 활발해질 수 있도록 상속·증여세제를 손질하겠다고 밝혔다. 급증하는 고령층은 돈이 있어도 안 쓰고, 젊은층은 돈이 없어 못 쓰는 상황을 타개하려면 조기(早期) 증여가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당초 기재부는 내년도 세제개편에 이 내용을 넣을지 말지를 놓고 끝까지 저울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정 기간 동안 일정 금액까지 주택자금 명목으로 자녀, 손자녀에게 증여할 때 세금을 물리지 않는 방안이 검토됐다. 이는 일본의 아베노믹스에서 힌트를 얻은 아이디어다. 일본 정부는 2013년부터 ‘일괄증여 비과세’ 제도를 시행해 자녀, 손자에게 결혼·육아·교육 자금으로 돈을 줄 때 2500만 엔(약 2억4400만 원)까지 증여세를 면제해주고 있다. 하지만 기재부는 총선을 앞두고 부자 감세(減稅) 논란이 일 것을 우려해 결국 중장기 과제로 돌렸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알아서 주택자금 등을 세금 없이 물려주고 있다. 현재 서울의 아파트 평균 전세금은 3억5000만 원, 전국 아파트는 2억 원이 넘는다. 부모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아파트 전세금을 마련할 수 있는 20, 30대 회사원이 얼마나 될까. 상속·증여세법에 따르면 성인 자녀는 10년간 5000만 원까지만 비과세로 부모 돈을 받을 수 있다. 그 이상의 주택자금을 부모에게서 받아 원리금을 갚지 않는 자녀는 10∼50%의 세금을 피해가고 있는 것이다.

세정당국도 소득이 있는 성인의 경우 2억 원대까지 증여를 사실상 눈감아주고 있다. 최근 국세청이 전세자금 불법증여 조사를 확대하면서 보증금 7억∼8억 원대 고액 전세만 대상으로 삼는 것도 이런 이유다. 한국의 상속·증여에 대한 세금이 세계적으로 가장 높다는 점, 스웨덴 오스트리아 싱가포르 등이 상속·증여세를 이미 없앴고 영국 등은 폐지를 검토하고 있다는 점도 세금을 세게 걷기 어렵게 한다.

자녀 세대에 이전된 부는 소비 측면에서 분명 긍정적이다. 집에 들어갈 돈을 아낀 만큼 다른 부분의 소비를 늘리기 때문이다. 그만큼 돈이 더 돌고 일자리도 더 만들어진다. 그러나 ‘노력만으론 성공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진 청년층의 상향이동 욕구를 출발선에서부터 위축시킬 수 있다는 건 딜레마다.

우리 사회가 이런 고민을 하는 건 광복 이후 처음이다.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 이전까지 물려줄 만큼 폭넓게 재산을 쌓은 세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이 논란을 현명하게 풀어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다만 이 문제가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는 식의 낡은 생각으로 풀 수 없는 난제란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