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을 파멸시킨 미국의 현대사, 유대인 눈으로 고발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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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회 박경리문학상 최종 후보자들]<5·끝> 유대계 미국 작가 필립 로스

《 제5회 박경리문학상 마지막 후보는 미국 소설가 필립 로스다. 평론가이자 미국 예일대 교수인 해럴드 블룸은 코맥 매카시, 토머스 핀천, 돈 드릴로와 함께 그를 ‘미국 현대문학의 4대작가’로 꼽았다.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 전미비평가협회상, 펜포크너상 등 각종 문학상을 휩쓴 그는 미국의 역사가 개인과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파헤친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미국의 목가’ ‘휴먼 스테인’으로 잘 알려졌다. 그의 작품세계를 김성곤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이 소개한다.》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작가 필립 로스는 2012년 ‘네메시스’를 발표하면서 “마지막 소설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인물을 비극적 상황으로 몰아넣어 역사와 사회의 이면을 보여주는 그의 문학적 모색이 계속되길 기대하는 독자가 많다. 동아일보DB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작가 필립 로스는 2012년 ‘네메시스’를 발표하면서 “마지막 소설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인물을 비극적 상황으로 몰아넣어 역사와 사회의 이면을 보여주는 그의 문학적 모색이 계속되길 기대하는 독자가 많다. 동아일보DB
필립 로스(82)는 특이한 작가다. 그는 유대계 미국 작가지만, 유대계 작가들이 즐겨 다루는 유대인의 정체성 탐구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 대신, 첫 소설집 ‘굿바이 콜럼버스’에서부터 그는 유대계 이민들이 미국의 중산층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무엇을 잃어버리고 또 어떻게 변해 갔는가를 탐색해 왔다. 로스의 주인공들은 아메리칸 드림과 물질적 성공의 혜택은 누리지만 결국은 미국 사회의 변화와 역사의 격랑 속에 휩쓸려 파멸한다.

로스는 화자(話者) 네이선 저커먼을 내세운 3부작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미국의 목가’ ‘휴먼 스테인’에서 미국인들이 자기만 옳다는 독선에 빠졌던 세 시대인 ‘매카시즘 시대’(1950년대), 진보와 보수가 대립했던 ‘베트남전쟁 시대’(1960, 70년대), 그리고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시대’(1990년대)를 배경으로 삼는다. 그는 매 시대의 사회적 격변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억압하고 파멸시켰는가를 자신이 창조한 화자이자 작가인 저커먼의 시각과 서술을 통해 고발하고 있다.

예컨대 ‘나는 공산주의자…’에서 로스는 아내가 남편을 소련 스파이로 고발하는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꿈과 사랑을 잃고 파멸하는 한 남자의 모습을 그린다. ‘미국의 목가’에서는 서구적 외모의 소유자이자 인기 운동선수로 아름다운 이방인 여인과 결혼해 미국의 중상류층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 유대계 남자가 1960, 70년대 일어난 미국 사회의 격변으로 파멸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60년대와 70년대는 베트남 반전 데모, 인종 갈등, 성 해방 운동, 워터게이트 스캔들 등으로 인해 진보와 보수주의가 극한으로 대립하고 투쟁하면서 서로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던 ‘독선의 시대’였다.

로스의 또 다른 작품 ‘휴먼 스테인’은 피부색은 희지만 실은 흑인인 콜먼 실크 교수의 삶과 죽음을 통해 미국의 소수 인종 문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보이지 않는 편견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의 딜레마를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콜먼이 백인 행세를 하면서 자신을 또 다른 인종차별 대상인 유대인으로 위장한다는 점, 그리고 흑인을 무시하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누명을 쓰게 된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자기만 도덕적으로 옳고, 다른 사람은 모두 틀렸다고 생각했던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 미국의 대학가를 휩쓸던 시대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마치 자기들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듯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의 성 추문을 맹렬히 비난하던 대학가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깔고 있다.

로스는 ‘휴먼 스테인’에서 인종차별과 사회 불의에 대처하는 세 가지 유형의 인간상을 제시한다. 예컨대 주인공 콜먼은 계몽이 안 된 사회에 자신의 삶과 미래를 맡기지 않고 자신의 방법대로 살아간다. 그는 자신의 피부색을 이용해 백인으로 살아가는 것.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가 사는 동안 내내 흑인이라는 그의 출신 배경과 어두운 과거만 볼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의 형 월터는 사회적 편견에 맞서 투쟁하면서 민권운동에 앞장선다. 그는 사회의 불의에 저항하지 않고 백인으로 살아가는 콜먼을 비겁하다고 비난한다. 또 다른 인간형으로 나오는 아버지 클래런스는 흑인도 백인과 같은 수준이 되면 차별받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녀들에게 완벽한 영어를 가르치고 초서와 셰익스피어, 디킨스를 읽게 하며 박물관과 음악회에 데려간다. 그러나 그는 기차의 식당 칸에서 백인의 시중을 들다가 쓰러져 죽는다.

로스는 미국의 현대사가 어떻게 개인의 삶을 억압하고 조종하며 파멸시켰는가를 지적으로,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작가다. 그러한 작업을 통해 그가 시도하고 성취하는 것은 인간의 뿌리 깊은 독선과 편견으로 점철된 현대사회에 대한 깊은 반성과 통렬한 비판이다. 그의 작품이 아직도 좌우 이념의 대립이 초래한 독선과 편견의 패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강렬한 호소력을 갖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김성곤 서울대 명예교수

○ 김성곤 심사위원은…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문학번역원장. 저서로 ‘경계를 넘어서는 문학’ ‘하이브리드 시대의 문학’ ‘글로벌 시대의 문학’ 등이 있다. 미국 뉴욕주립대 영문학 박사로 한국 현대영미소설학회장, 한국아메리카학회장, 한국대학출판부협회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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