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인규]‘개천의 용(龍)’이 ‘이무기의 비극’을 은폐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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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한림대 경제학과 교수
김인규 한림대 경제학과 교수
‘개천에서 용(龍) 나는 사회!’ 공정한 사회의 대명사처럼 들린다. 하지만 실상은 대다수 ‘실패한 이무기의 비극’을 극소수 성공한 용의 신화로 숨기는 사회다. 가난한 집안의 수재인 홍준표 경남지사가 사시(사법시험) 합격을 통해 출세 가도를 달리며 골프채를 휘두를 때 그 수백 배나 되는 인재들이 고시 폐인으로 인생을 허비한 사회다.

사시는 2017년 시험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최근 국회의원 자녀들의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 음서(蔭敍)’ 논란이 불거지면서 ‘개천의 용’을 위해 사시를 존치시키자는 여론이 힘을 얻어 가고 있다. 음서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조정 대신의 자녀나 친인척을 과거(科擧)시험 없이 관리로 등용하던 제도다.

사시 존치가 필요한가? 여기에 대한 답을 구하려면 사시의 원조인 과거제부터 살펴봐야 한다. 많은 학자들은 과거제가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개천에서 용이 나오도록 만든 훌륭한 제도였다고 찬양한다. 하지만 작년에 작고한 고든 털럭 교수는 폐해가 매우 컸던 제도라고 분석했다. 그는 ‘공공선택론(Pubic Choice)’이란 경제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학자다.

털럭 교수는 1940, 50년대에 미국 국무부 관리로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근무했다. 그때부터 그는 무엇이 동아시아의 정체(停滯)를 불러와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이후 학자로 변신한 그가 찾아낸 답은 과거제였다.

과거 급제는 그야말로 ‘대박’이지만 로또 당첨만큼이나 어려웠다. 경제학 용어로 ‘경제적 지대(地代·rent)’라 불리는 그 대박을 추구하느라 급제자의 수천 배에 달하는 인재가 평생을 허비했다. 생산적 활동에 종사해야 할 유능한 인재들이 비생산적 이무기로 생을 마쳤다. 엄청난 사회적 낭비였다.

지금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유명 과거 급제자의 답안을 일반에 전시 중이다. 그 답안들은 과거 공부가 국가경영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비생산적 공부였음을 잘 보여 준다. 답안 대부분이 임금이 어질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하나 마나 한 전문가 답변’이다.

영국을 비롯한 서구에는 과거제에 해당하는 제도가 없었다. 귀족이 아니면 고위 관리나 고위급 장교가 될 수 없었다. 중산층 인재들은 일찌감치 상공업과 해외 무역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결과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부르주아(자본가) 계급이 탄생했다. 동 시대 동아시아의 정체와 대비되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부정적 과거제의 유산인 사시지만 괜찮은 일자리가 많았던 지난 개발 연대에는 부작용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성장이 둔화되면서 고시 낭인이라는 이무기가 다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이 문제를 해소하고 좀 더 전문적인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로스쿨을 도입했다. 그 로스쿨 제도가 지금 음서 논란으로 휘청거리고 있다.

사시 존치는 이무기 문제뿐만 아니라 사시 출신과 로스쿨 출신 간의 끊임없는 파벌 싸움을 야기할 것이다. 막아야 한다. 그러려면 첫째, 로스쿨 신입생 정원 중 5∼10%를 취약계층에서 뽑는 현재의 쿼터제를 판검사 등의 공직 임용으로 확대 적용해 ‘개천의 용’ 논란을 잠재우라. 둘째, 전현직 고위 공직자의 로스쿨 출신 자녀를 채용할 때는 그 사실을 공시하라.

그리고 이번 기회에 고비용 저효율이란 평가를 받고 있는 로스쿨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필요가 있다. 미 워싱턴대 로스쿨의 브라이언 타마나하 교수는 ‘로스쿨은 끝났다’라는 저서에서 현재 3년제인 로스쿨을 2년제로 바꿔도 별문제가 없다고 고백한다.

타마나하 교수는 로스쿨이 교수들만을 위한 제도로 변질됐다고 개탄한다. 학생들은 비싼 수업료 때문에 졸업과 동시에 빚더미에 올라앉는다. 그는 수업 연한을 2년으로 줄이고 법학도서관과 같은 불필요한 시설 요건을 완화해 학생들의 수업료 부담을 경감시키라고 호소한다.

타마나하 교수의 제언을 받아들여 우리나라 로스쿨을 2년제로 바꿨으면 좋겠다. 만약 그것이 어렵다면 첫 2년은 수업료를 받되 나머지 1년은 수업료가 없는 ‘자기 주도적 학습의 해’로 운영하길 제안한다.

홍 지사를 비롯한 법조 기득권 세력은 사시 존치를 위해 여론전을 펴고 있다. 그들은 인화성이 강한 청년 실업 문제에 ‘로스쿨 음서’라는 성냥불을 갖다 댔다. 로스쿨 제도의 혁신적 변화 없이는 이 불을 끄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김인규 한림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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