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스케치]관절염 달고 살며 홍학쇼 30여년… 동물도 서러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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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동물의 생로병사

지난달 28일 인터넷에 끔찍한 사진들이 공개됐다. 수십 마리의 동물 사체가 냉장고와 쓰레기통에서 썩어가고 있는 장면이었다. 발견된 동물 사체는 17종 26마리. 문 닫은 어느 사설 동물원에 있던 동물들이었다. 전 동물원 관계자들은 “죽은 걸 보관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는 동물원 폐업 전 먹이가 없어 굶어 죽은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사진을 보며 문뜩 한 동물원 간부의 말 한마디가 떠올랐다. “얘들은 태어날 때부터 속박 받는 존재야. 그렇다고 개나 고양이처럼 사람들한테 사랑 받지도 못하지. 이도 저도 아닌, 동물계의 맨 밑바닥이라고나 할까.”

1909년 일제가 우리 땅에 처음으로 동물원(창경원)을 조성한 이래 ‘동물원 동물’은 유희와 조롱의 대상이었다. 비좁고 열악한 사육공간에서 전시되다 늙고 병들면 그대로 도태됐다. 2015년 현재 ‘동물원 동물’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8년 만에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 태어난 기린 엘사(오른쪽)는 머지않아 최고 인기 동물이 될 것으로 보인다. 대공원 측은 조만간 엘사를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서울대공원 제공
8년 만에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 태어난 기린 엘사(오른쪽)는 머지않아 최고 인기 동물이 될 것으로 보인다. 대공원 측은 조만간 엘사를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서울대공원 제공
▼생(生): 동물원 금수저 흙수저▼

손 귀한 기린 8년만에 낳은 새끼… 24시간 특별관리 받는 ‘금수저’
번식력 강한 코요테는 ‘흙수저’


7월 초 경기 과천시 서울대공원에 경사가 있었다. 손이 귀한 기린 새끼가 8년 만에 태어난 것이다. 수컷 기린이지만 이름은 영화 ‘겨울왕국’ 공주의 이름인 ‘엘사(Elsa)’. 더위 타지 말고 건강히 자라 달라는 사육사의 소망이 담겼다. 기린사에서 24시간 특별관리를 받으며 자란 엘사의 키는 어느덧 220cm를 훌쩍 넘겼다. 조만간 방사장에 나가 관람객을 만나는 공개행사도 예정돼 있다. 엘사는 동물원에서 최고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존재다.

그런데 대접 못 받는 동물이 더 많다. 올해 충북 청주시 청주랜드 동물원에서 태어난 코요테 새끼 3마리(수컷 2, 암컷 1)는 ‘흙수저’다. 우선 코요테는 숫자가 많다. 원래 서식지인 미국 등 북미 대륙에선 도심에서 심심찮게 관찰될 정도로 흔하다. 게다가 번식력도 뛰어나다. 코요테가 16마리까지 늘어난 서울대공원은 코요테 수컷에게 중성화 수술까지 시켰다.

송태헌 청주동물원 사육실장(56)은 “부모가 살고 있는 우리에 코요테 새끼가 전부 같이 사는 건 무리”라며 “멸종위기종이나 전시 가치가 뛰어난 동물도 아니라 입양처도 찾기 쉽지 않다”고 우려했다.

국내에선 매년 몇 마리의 동물이 동물원에서 태어나고 폐사하는지도 파악이 안 된다. 동물원을 규정한 법률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2013년 9월 ‘동물원법’을 시작으로 비슷한 법안이 3개나 더 발의됐지만 통과된 건 하나도 없다.

동물원법을 대표 발의한 장하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동물원 동물이 태어나서 사망하는 과정 전체를 관리, 감독할 수 있는 입법이시급하다. 이미 동물원법 도입 찬성 여론이 90%에 이른다”며 “법에 명시된 동물원 시설 개선 등은 사육사나 관람객의 안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창경원 시절 서울대공원에 수입된 칠레 홍학들은 동물쇼에 동원되며 각종 질병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쇼가 폐지되고 1년이 지나자 짝짓기를 하는 등 회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천=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창경원 시절 서울대공원에 수입된 칠레 홍학들은 동물쇼에 동원되며 각종 질병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쇼가 폐지되고 1년이 지나자 짝짓기를 하는 등 회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천=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노(老): 동물도 나이 들면 서럽다▼

늙고 병든 칠레홍학들 쇼 중단뒤 둥지 짓고 짝짓기까지 ‘회춘’
시베리아호랑이는 골방에서 말년


올해로 11세인 서울대공원 말레이곰 ‘꼬마’가 유명해진 건 5년 전 ‘서울대공원 곰 탈출 사건’부터다. 당시 꼬마가 연상녀 말순이(35세 추정)와 살기 싫어서 도망쳤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올여름에 만나 본 두 곰의 사이는 여전히 나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5년 세월이 바꾼 건 둘 사이의 권력지도다. 추윤정 사육사(33·여)는 “예전에는 꼬마가 말순이를 피해 도망 다녔다. 그런데 이제는 말순이가 꼬마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 먹는다”고 했다. 말순이는 말 그대로 ‘폭삭’ 늙었다. 사람으로 치면 이미 팔순을 넘긴 말순이. 흰털이 잔뜩 덮인 등허리와 함께 머리 쪽 검은 털도 듬성듬성 빠졌다. 관절염도 왔다.

그래도 말순이 신세는 옆집 호랑이사에 사는 시베리아호랑이 ‘크레인’(15세)보다 낫다. 8년간 강원도 한 동물원에서 타향살이를 하다 2012년 12월 고향 서울대공원으로 돌아온 안면기형
호랑이 크레인.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크레인은 지금까지 한 번도 야외 방사장에 못 나갔다. “다른 호랑이보다 작고 늙어서 다른 호랑이에게 공격당할 수 있다”는 게 동물원의 공식 입장. 하지만 “못생긴 외모 탓이 크다”는 얘기가 공공연하다. 결국 국내 최초로 조성된 자연형 호랑이 방사장 ‘호랑이 숲(2600m²)’을 지척에 두고도 크레인은 80m²의 비공개 사육장에서 생을 마쳐야 한다.

전문가들은 노령 동물의 행복한 노후를 위해선 사육 여건 개선이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2년 전 홍학쇼를 폐지한 서울대공원 홍학사의 변화가 대표적이다. 이곳에 사는 칠레홍학 23마리는 1969년 창경원 시절 수입된 개체다. 이들은 홍학쇼가 있던 시절 관절염과 족(足) 질환을 내내 달고 살았다. 중간에 11년간은 쇼가 중단되기도 했다. 번식은 꿈도 못 꿨다. 하지만 쇼가 폐지된 지 1년이 넘자 전에 없었던 행동이 나타났다. 다 늙어서 둥지를 짓고 짝짓기를 하고 있다. 회춘이 뒤늦게 찾아왔다.

서울대공원에 있는 돌산양 한 마리가 정기 X선 검진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일부 동물원에선 수의사가 없어 건강검진은커녕 응급수술조차 못하는 곳도 있다. 서울대공원 제공
서울대공원에 있는 돌산양 한 마리가 정기 X선 검진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일부 동물원에선 수의사가 없어 건강검진은커녕 응급수술조차 못하는 곳도 있다. 서울대공원 제공
▼병(病): 동네병원보다 못한 동물원 동물병원▼

형편 좋은 서울선 매주 건강검진
재정 열악한 지방 동물원에선 수의사 1명이 600마리 돌보기도


동물원 동물도 아프면 병원에 간다. 하지만 서울-지방의 병원 간 격차는 동물원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7월 10일 오른팔이 산산조각 난 서울대공원의 9년생 암컷 개코원숭이는 4시간이 넘는 전신마취 수술을 받고 기사회생했다. 수술 도중 맥박이 약해지는 위험 순간이 있었지만 최고 수준의 수의사들이 새로운 삶을 선물했다. 운동량이 많은 원숭이에게 건강한 팔다리는 생존의 필수조건이다.
살림살이가 괜찮은 동물원에서는 건강검진도 실시한다. 서울대공원은 올 4월부터 매주 금요일을 ‘예방검진의 날’로 지정했다. 검진일마다 20kg이 넘는 ‘이동식(포터블) X선’장비, 혈액, 결핵, 기생충 검사 도구가 동원된다. 웬만한 병원의 이동 건강검진보다 설비가 더 나아 보일 정도다.

하지만 재정이 열악한 지방 동물원에서는 검진은커녕 제대로 된 치료조차 엄두를 못 낸다. 7월 중순 찾아간 광주 북구 우치공원에는 수의사 혼자서 동물 634마리를 돌보고 있었다. 진료실 처치대(수술대)에는 약품통이 널려 있었다. 수의사 최종욱 씨(47)는 “공간 자체가 좁아서 진료실 바닥에 비닐을 펴고 쪼그려 앉아 수술한다”고 말했다. 동네 동물병원에도 있는 X선 장비, 혈액 검사기 같은 기본적인 장비도 없다. 최 씨는 “골절된 동물은 직접 손으로 만져서 진단하고 치료한다”고 말했다. 우치공원에 배정된 올해 동물 진료예산은 800만 원. 가격이 3000만 원이 넘는 이동식 X선 장비는 고사하고 700만 원짜리 일반 X선 장비도 못 산다. 전국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하는 동물원 17곳 가운데 수의사가 한 명도 없는 동물원이 7곳이나 되는 게 지방의 실정이다.

동물원 동물은 정신병도 앓는다. 특히 쇼에 동원된 동물들이 심하다. 이항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는 “동물쇼 훈련 과정에서 받는 학대나 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하다”며 “자연 상태에서는 절대로 하지 않을 정형행동(우리를 빙빙 도는 등 이유 없이 반복하는 행동)을 할 확률이 매우 높다”고 지적했다.

동물원에서 발생하는 사체 중 상태가 좋은 동물은 박제된 뒤 전시와 연구에 활용된다. 서울대공원 박제사들이 앵무새 박제를 만들고 있다. 과천=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동물원에서 발생하는 사체 중 상태가 좋은 동물은 박제된 뒤 전시와 연구에 활용된다. 서울대공원 박제사들이 앵무새 박제를 만들고 있다. 과천=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사(死): 아낌없이 주고 떠나는 동물▼

동물 73%는 폐사 후 소각처리… 15%는 박물관-수의학용 박제로
복원연구에 쓸 DNA도 남기고 가


동물원 동물은 어떻게 세상을 등질까. 국내에선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종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CITES)’에 등재된 종만 확인 가능하다. 장 의원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2012∼2015년간 사망한 동물 757마리 중 질병으로 폐사한 개체가 48.8%로 절반 정도였다. 동물원 측의 관리 소홀과 사고로 사망한 경우도 11.2%나 됐다. 이 수치에 토끼, 염소, 꽃사슴 등 비(非)멸종위기종을 포함하지 않은 걸 감안하면 실제 방치된 채 죽은 동물 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물 10마리 중 7마리(73.1%)는 폐사 후 소각된다. 그리고 일부(14.5%)는 박제로 제작된다. 자연사박물관이나 학교, 공원 등지에서 볼 수 있는 박제의 대부분은 동물원에서 죽은 동물 사체로 만든 것이다. 박제 제작을 위해서는 가죽과 살점을 분리해야 한다. 보통 얼려 뒀다 녹이면서 복부 지방부터 살, 갈비뼈 순서로 제거한다. 이후 뼈만 남기는 골격 표본을 만들려면 산소가 있는 곳에서 번식하는 호기성 세균을 이용한 인위적인 부패 과정을 한 번 더 거친다. 코끼리 등 큰 동물을 표본으로 만들려면 4, 5년간 땅에 묻고 자연 부패시키기도 한다. 동물 박제가 중요한 이유는 생태학과 수의학 연구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요즘은 동물 복원, 연구 목적으로도 각광 받는다. 소백산국립공원 일대에서 진행 중인 ‘토종여우 복원 사업’에는 1960, 70년대 만들어 둔 여우 박제에 유전자(DNA)가 남아 있어 가능했다.

동물원 동물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늙고 병들 때까지 그리고 죽은 뒤에도 인간에게 모든 걸 주고 떠난다. 셸 실버스타인의 소설 ‘아낌없이 주는 나무(1964년)’에 나오는 나무와 다르지 않다. 원치 않은 환경에 태어났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기다리는 동물들. 어린아이에게는 신비로움과 기쁨을, 함께 찾은 어른에겐 마음의 위안을 주는 동물원 동물. 이번 주말에는 가까운 동물원을 찾아서 가장 좋아하는 동물과 마주해 보는 게 어떨까.
과천·청주=이철호 기자 irontiger@donga.com / 광주=김예윤 인턴기자(고려대 역사교육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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