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박성원]문재인 식 선위(禪位) 파동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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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질이 고질이 됐다. 유독 경들만 모르고 있다. 내가 하루를 더 왕위에 있으면 백성들이 하루를 더 걱정하게 된다.” 1592년 11월 21일 선조는 ‘병 때문에 죽을 지경’이라며 세자인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선위를 하겠다고 말했다. 임진왜란은 그해 4월 발발했다. 외침에 대비하지 못해 백성들을 사지에 몰아넣은 무능한 임금은 물러나야 한다는 상소에 대한 왕의 대답인 셈이다. 선조는 7년의 임진왜란 기간에 15차례나 양위(讓位) 파동을 일으켰지만 강력히 만류하는 신하들 덕분에 번번이 없던 얘기가 됐다.

▷조선시대 선위 파동은 주로 정통성을 의심받는 군주들의 정국 반전 카드로 활용됐다. 태종은 재임 기간 세 차례 양위 발언을 내놓은 뒤 신료들의 반응을 보고 장차 왕실에 위험이 될 만한 외척과 공신을 제거함으로써 권력을 강화했다. 세조는 집권 8년 차인 1462년 세자에게 양위 선언을 했으나 직계 공신들이 반대하자 거둬들이고 양위론이 타당하다고 맞장구쳤던 정창손을 직위해제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주승용 최고위원이 어제 “조선시대에도 재신임 같은 선위 파동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이는 항상 비극의 서막이었다”며 “그래도 강행하시겠다면 나를 밟고 가라”고 말했다. 혁신안이 중앙위원회에서 박수로 통과된 다음에도 문재인 대표가 대표직 재신임 투표 의사를 거두지 않자 철회를 요구하며 한 얘기다. 여기저기서 재신임 투표 철회를 권유하자 문 대표는 “재신임 투표 생각에 변함이 없다”면서도 “중진들의 의견을 경청해 나가겠다”며 여운을 남겼다.

▷이로써 재신임을 통해 비노 비주류가 더는 자신을 흔들지 못하게 하려는 문 대표, 재신임을 무산시켜 문 대표의 독주를 막겠다는 비노 비주류가 타협할 가능성이 생겼다.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은 측근 비리 사건이 터지자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고 했다. 당시 민정수석비서관이 문 대표였다. 결국 재신임 투표는 없었고 이듬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승리했다. 문 대표는 ‘재신임 카드’ 정치를 거기서 배웠을지 모르지만 열린우리당은 지금 세상에 없다.

박성원 논설위원 sw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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