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 연인 낙태시키고 무참히 살해한 군인의 최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8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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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여자의 휴대전화 주소록에서 이 애칭이 저장된 전화번호를 본 남자의 질투는 열등감과 광기에 휩싸여 결국 핏빛으로 끝맺었다. 얼마 전까지 남자를 위한 애칭이었던 ‘여보’는 어느새 다른 남자의 전화번호로 바뀌어 저장돼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아버지 없이 자랐고, 어머니마저 재혼하면서 혼자 남겨진 채 자란 남자는 유일한 사랑이라 믿고 집착해왔던 여자의 배신을 확인한 순간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놓고 잔혹한 악마가 됐다.

●낙태와 폭력으로 망가진 연인

현역 상근예비역 상병 박모 씨(22)는 2013년 5월 친척 소개로 당시 17살이던 A 양을 만나 연인이 됐다. 둘은 사귄지 6개월 만에 동거하는 사이로 발전했지만 A 양이 임신을 했다가 박 씨의 설득으로 낙태를 하게 되면서 관계에 균열이 생겼다. 그로부터 한 달 뒤 A 양은 박 씨 집을 나와 친구 집으로 들어갔다. 이후에도 둘은 종종 만남을 가졌지만 예전 같지 않았다. 박 씨는 집에 놀러온 A 양과 말싸움을 하다가 급기야 얼굴에 손을 대기까지 했다. 둘 사이는 어느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박 씨는 지난해 4월 18일 상근예비역 복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A 양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박 씨가 잇따라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A 양은 딱 한번 잠깐 전화를 받았을 뿐 이후부턴 감감 무소식이었다. 초조해진 박 씨는 A 양와 함께 사는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가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친구는 “A 양이 오빠를 많이 좋아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거 같다”며 “밤늦게까지 남자들이랑 술 마시고 들어오는 건 좀 아니지 않느냐”고 전했다. 박 씨는 ‘진실’을 밝히고 A 양을 살해하기로 결심했다.

●“오늘 나랑 같이 있을 거지?”

박 씨는 A 양에게 계속 전화를 건 끝에 간신히 통화할 수 있었다. A 양은 동네 중학교 근처에 있다고 했다. 박 씨는 집 부엌에서 가져온 흉기를 신문지에 싸 외투 안주머니에 넣고 택시를 탔고, A 양을 태우고 다시 집 근처로 돌아갔다. 택시에서 내린 둘은 마을 농로를 따라 걷다가 한적한 곳에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A 양이 그동안 힘들었던 속내를 털어놓자 박 씨는 살갑게 달래줬다.

얼어붙었던 관계가 녹아든다고 생각한 박 씨는 A 양에게 “오늘 나와 함께 있어 줄 거지? 우리 계속 만날 수 있는 거지?”라고 물었다. “응”이라는 바라던 대답을 얻자 박 씨는 A 양에게 키스를 시도했고, 둘은 농로에서 나체로 성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농로를 오가는 차량 불빛 때문에 종종 주변이 환해지자 옷을 입고 인근 후미진 건물 담벼락으로 장소를 옮겼다. 담벼락에 기대 대화를 이어가던 박 씨는 혹여나 불타오른 관계가 꺼질까 두려워 재차 “오늘 나랑 같이 있을 거지?”라고 물었다. 하지만 A 양은 “어떻게 그래. 집에 가야지”라며 “내일 짐을 싸서 다시 오겠다”고 말을 바꿨다.

박 씨는 바로 자신을 따라오지 않으려는 A 양이 이별을 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잔혹한 복수를 다짐했다. A 양과 성관계를 맺는 도중 살해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박 씨는 재차 키스를 시도하며 성관계를 이어가다가 외투에서 미리 준비해온 흉기를 꺼내 A 양을 찔렀다. A 양이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흉기가 부러지자 박 씨는 주변에서 다른 둔기를 주워 휘둘렀다.

●‘징역 30년’ 확정으로 끝맺은 광기

박 씨는 쓰러져 신음하는 A 양의 핸드백을 빼앗아 휴대전화를 꺼냈다. 휴대전화 속의 ‘여보’가 다른 남자 전화번호로 저장돼있는 걸 확인하고는 질투와 열등감에 사로잡혀 광기에 휩싸였다. 박 씨는 “군복 입고 있으니 만만해보이냐”며 다시 둔기를 휘둘렀다. 몸에 묻은 혈흔을 닦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근처에 있는 집으로 갔다가 A 양 지갑에서 임신검사기를 발견하곤 화가 치밀어 다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박 씨는 “내가 한번이라도 다른 여자랑 술 마시고 그런 적 있냐. 나는 믿음 하나로 지켰는데 너는 이렇게 날 배신하느냐”며 “오늘 너 죽고 나 죽고 다 끝내자”고 분노를 쏟아냈다. 박 씨는 A 양이 “오빠 미안해, 안 그럴게”라고 애원하자 외도를 시인한 거라 생각해 더욱 광기에 휩싸여 벽돌을 던지고 둔기를 휘둘렀다.

박 씨는 폭행을 견디지 못하고 서서히 숨이 끊어져가는 A 양을 바라보며 담배 두 개비를 피우곤 도망쳤다가 덜미가 잡혔다. 1, 2심 법원은 “박 씨는 피해자가 변심했을지도 모른다는 일방적인 의심만으로 살인을 저질렀고 방식이 잔혹했다”며 징역 30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유족이 보복을 두려워하며 법정 최고형을 선고해달라고 요구한 점도 감안됐다. 재혼한 박 씨 생모가 아들 소식을 듣고 피해자 유족을 위해 5000만 원을 공탁했지만 너무나 뒤늦은 모정이었다. 대법원 1부(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박 씨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8일 밝혔다.

조동주 기자 dj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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